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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의 오늘은 SF] 이 행복한 대안세계
이경희(SF 작가) 2023-02-16

<스피어>

마이클 크라이튼의 <스피어>는 내가 손꼽을 정도로 좋아하는 SF 중 하나다. 소설 버전도 영화 버전도 무척 사랑스럽다. 어릴 적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우주선을 무대로 팬픽 비스무리한 습작을 쓴 적이 있을 정도다. 스토리는 조금 엉성하고 인물들은 가끔 이상한 행동을 하지만, <스피어>에는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이 한가득 들어 있다. 작품을 좋게 평가하는 데에는 무수한 나쁜 점이 걸림돌이 되지만, 사랑하는 데에는 오직 한 가지 좋은 점만 있어도 충분한 법이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심해에서 300년 전 추락한 우주선이 발견되고, 우주선이 외계인의 것이라 생각한 정부는 당연하게도(?) 각 분야의 전문가를 소집해 조사단을 꾸린다. 바다 깊은 곳까지 잠수해 우주선 내부로 진입하는 탐사대. 그런데 놀랍게도 우주선에는 영어가 쓰여 있다. 오래전 사망한 선원들이 기록한 항해 일지에 따르면 우주선은 미래에서 왔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우주를 여행하다 시간을 도약해 수백년 전 과거에 추락하게 된 것이다.

우주선은 지구 밖에서 어떤 물체를 운반 중이었다. 정체불명의 금빛 구체. 아마도 선원들이 전멸한 원인은 그 구체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시간을 도약한 것도 구체 때문일지 모르고. 과학자들은 신비로운 구체에 매료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구체 내부에 걸어 들어갔다 돌아온다. 그리고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 구체에는 특별한 힘이 있다. 사람들이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모든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힘. 태풍으로 고립된 어둑한 심해에서 이 괴상한 능력은 최악의 형태로 발현된다. 각자가 두려워하는 모든 우려와 불안이 현실이 되어 덮쳐들기 시작한다. 문득 누군가 상상해버리고 만다. 우린 모두 여기서 죽을 거야.

‘상상하는 모든 것이 현실이 된다’는 설정은 내가 오래전부터 매료된 SF 재료 중 하나였다. 지금도 꾸준히 비슷한 주제의 이야기를 쓰고 있기도 하고. 상상하는 모든 욕망이 충족된다면 인간은 어디까지 욕망할 수 있을까? 끝은 있을까? 영원히 새로운 욕망을 탐구하게 될지, 혹은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에 이를지. 어쩌면 그게 내가 이야기를 창작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스피어> 속 구체의 능력은 작가의 능력이기도 하니까.

이야기를 창작하는 능력은 온갖 대안세계를 가능케 한다. 새로운 해방구를 제공해준다. 저 좁은 골목길로 방향을 꺾으면 행복으로 통하는 문이 있을지도 몰라. 우리 함께 문을 열고 그곳으로 떠나자. 우리는 고정된 현실에 갇힌 약하고 가엾은 존재이지만, 이야기라는 가정법의 도구를 통해 소망하는 모든 가능성의 세계로 탈출할 수 있다. ‘그녀의 세계가 파괴되었다’라는 문장은 대개의 경우 그저 은유적 표현일 뿐이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그녀의 세계는 물리적으로 완전히 파괴되어버릴 수 있다. 온전히 재생될 수 있다. 이야기는 모든 것을 파괴할 힘이자 치유할 힘이다.

글쓰기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이야기가 매번 내 마음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점일 것이다. 인물들은 멋대로 행동하고, 미리 구상해둔 아이디어는 쓸모를 잃는다. 생각지도 못했던 참신한 설정과 아이디어가 그 장면을 쓰기 불과 두 문장 직전에 떠오르기도 한다. 무의식이 몰래 준비해둔 선물을 두근대는 마음으로 기대하며 나는 크리스마스이브날의 아이처럼 눈을 감고 소설이라는 슬롯머신을 당긴다.

뻔뻔하지만 스스로 참 쓰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소설로 <저 먼 미래의 유크로니아>라는 중편이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정원’은 끝없이 미래로 시간 여행을 하며 지구 역사의 마지막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세계와 마주한다. 인간의 젠더가 수백 종류로 분화된 세계, 그 구별조차 사라진 세계, 고립된 차별자와 혐오자들이 자기들끼리 서로를 찔러 죽이는 미래, 기계 몸이 되어 영생을 달성한 사람들, 온몸을 미뢰(味蕾)로 바꾸어 달콤한 설탕물 속에서 파트너와 나누는 스킨십, 20종이 넘는 탈착식 성기를 그날의 기분에 따라 바꿔 끼우는 육체관계, 자신의 클론과 결혼한 남자, 서로의 뇌를 봉합해 하나가 되어버린 연인, 미지의 다자 연애를 실험하는 탐구자들, 우주의 끝까지 다녀온 여행자와 우주의 열죽음 이후를 대비하는 로봇, 너무 거대해져버린 나머지 초신성 폭발의 에너지를 이용해야만 섹스할 수 있는 행성 크기의 거인들…. 이 지루하고 긴 줄거리가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내가 무의식적으로 증오하고 욕망한 모든 것들이 직접적인 형태로 해소된다. 노골적인 대리충족 소설.

결국 나는 대안세계를 꿈꾸는 겁쟁이다. 현실을 바꿀 자신도 없고 능력도 없기에 픽션을 쓴다. 글로 만든 피난처에 안전하게 겨울잠을 자듯 몸을 웅크리고 현실이 바뀌기만을 기다린다. 다시 없을 행복을 누리며. 그 끝에 시시한 현실과 지독한 상실감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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