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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철의 영화비평] <곡성>의 종구가 저지른 실수는 무엇이었나

*영화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곡성>

<곡성>(哭聲)은 제목 그대로 ‘소리’에 관한 영화다. 한 인간이 두 귀신을 각각 만나 목소리를 듣는다. 들리는 대로 들었으면 될 텐데 그는 그러지 못했다. 그게 ‘곡소리’를 낳는다. 구약에 나오기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는 데 사용한 것은 ‘말씀’이다. 물론 내 입에서 터져나오는 말과는 분명 다른 어떤 것이겠으나, ‘그’는 자기 손으로 이것저것들을 직접 세우진 않았을 것 같다(만약 그랬다면 그는 끝없는 육체적 피로를 안고 사는 노동자 계급을 만들지 않았으리라). 기독교를 믿든 안 믿든 말이란 소중하다. 성경, 불경, 코란, <소크라테스의 변명> 등 소중한 책은 말에서 시작되었다. 성자는 오직 말로 마음과 뜻을 전했고, 그의 제자들이 문자와 책으로 그것을 남겼다. <곡성>은 영화를 열기 전 누가복음의 몇 구절을 먼저 전한다. 예수는 자기 살과 뼈를 보고서도 왜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는지 묻는다. 그래서 직접 만져보라고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예수와 소크라테스는 권력자로부터 죽임을 당했다. 권력자의 눈에 그들은 거슬리는 존재였음이 분명하다. 그럴 때 ‘현혹’이란 말을 내세운다. 예언자와 지혜로운 자들의 말이 젊은이들의 눈을 멀게 한다는 핑계를 앞세운다. 사람들은 그 핑계에 속아 예수가 그들을 현혹했다고 생각한다. 예수는 거짓을 진실이라 속인 적이 없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현혹당했다고 여겼던 것일까.

<곡성>의 주인공 종구(곽도원)는 경찰이다. 사건이 일어나면 그는 현장에 도착해 조사하고 말을 듣는다. 직업에 어울리지 않게 그는 나약한 면모가 단점이다. 마을에서 수상한 존재로 소문이 난 일본인(구니무라 준)과 처음 대면했을 때,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바보 같은 표정뿐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해괴한 일이 일어날 동안 이런저런 의심만 품던 그는 자기 딸 효진(김환희)에게도 동일한 병이 나자 사건에 깊숙이 빠져든다. 그는 무명(천우희), 일본인, 일광(황정민)을 차례로 만나 말을 듣는다. 동네의 미친 여자 같은 차림새로 사건 현장에 나타난 무명은 “왜놈이 귀신이다. 그놈이 자꾸 꿈에 나타나는 건 가족들의 피를 말려 죽이려는 의도다”라는 말을 전한다. 일본인은 말을 아끼는 대신 이미지로 자신을 드러내는 쪽이다. 꿈에서 그는 훈도시를 입고 짐승의 간을 먹다 붉은 눈을 한 채 다가와 아가리를 벌린다. 굳이 말하라고 요구하면 “말해도 믿지 못할 것이다”라고 답한다. 왼쪽 길로 운전하며 도착한 도사 일광도 무명과 마찬가지의 말을 흘린다(하지만 그의 의도는 다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일본인은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다. 귀신 중에서도 갑에 해당하는 악질이다. 그냥 놔두면 큰일이 날 것이다”.

이것은 누구와 누구의 게임인가?

여기서 질문해보자. 그들 중에 거짓말을 한 자가 있는가? 그들 중 자신의 정체를 숨긴 자는 아무도 없다. 굳이 손가락질하자면 일광이 그런 자에 해당하지만, 그는 일본인이 궁지에 몰렸을 때 불러온 원군이다. 결말부에서 무명은 “도사도 한패야, 믿지 마”라고 말한다. 일광은 자기 역할에 충실하다. 도착했을 때나 굿판을 벌일 때나 꽁지를 내빼고 달아났다 되돌아왔을 때 공히 그는 일본인을 죽이려는 척하며 보호한다. 극중 일광의 정체를 묻는 자가 아무도 없기에 정체를 말하지 않을 따름이다. 가장 현혹하는 인물로 보이는 그조차 패를 숨기기보다 드러내는 쪽에 더 가깝다. 일본인에게 살을 내리겠다고 말한 다음 그는 슬며시 옷을 벗어 훈도시를 착용한 아랫도리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무명, 일본인, 일광을 차례대로 만난 종구는 왜 ‘가족을 살리는’ 판단을 하지 못할까.

종구가 해야 했을 판단을 ‘선과 악’이 아닌 ‘가족을 살리는’ 판단이라고 부른 이유는 <곡성>이 선악의 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곡성>이 무명과 일본인이 벌인 게임이라고 본다. 각기 다른 세상을 대변하는 두 존재는 언젠가 인간을 데리고 한번 놀아보자고 서로 제안하지 않았을까? 웬 유희냐고? 아니라면 굿을 한 뒤 맥빠진 일본인 곁으로 무명이 슬쩍 지나가는 걸 어떻게 봐야 할까(투쟁하는 선악의 대변자라면 그 기회에 일본인에게 일격을 가해야 맞다). 에로영화도 아닌데 무명은 왜 폭포수 아래 정신을 가다듬는 일본인을 훔쳐보는가. 또한 숲 장면에서 앞뒤로 뛰어다니는 무명과 일본인은 추격전 놀이에 취한 아이들 같다. 일본인이 추락한 것도 놀다 일어난 실수가 아닐까. 무명도 일본인도 그 정도로는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쯤은 안다. 정작 게임에 끼어든 인간의 대가는 가혹하다. 속수무책으로 생명을 걸어야 한다. 누가 이기고 지느냐에 따라 인간의 생사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무명과 일본인은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을 터인데, 각자 한번씩 페어플레이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 무명이 직접적으로 상대를 악마라 저격하자, 일본인은 한패를 부르는 것으로 대응한 것. 제일 흥미로운 부분은, 승패를 가르는 선택을 인간에게 맡긴 점에 있다. 결국 살고 죽는 결과의 책임은 인간에게 돌아간다.

불신의 반대말

적어도 <곡성>에서 ‘불신’은 ‘믿음’의 반대말이 아니다. 불신은 ‘믿지 않는다’가 아니라 ‘믿지않는다’라는 한 단어의 다른 표현이다. 여기서 불신의 반대말을 말하라면 ‘삶’이다.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무명, 일본인, 일광은 더욱 극적으로 종구에게 접근한다. 일본인은 일광이 되돌아오게 한 다음 종구를 달래도록 명령하고, 무명은 무명대로 왜놈이 악마라는 말을 재차 들려준다. 영화와 함께 게임이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그들은 몸동작까지 더해 자기 목소리에 힘을 실으려 한다. 무명이 종구의 손을 잡는 순간은 그런 점에서 뭉클할 정도다. 그것은 예수가 자신의 살과 뼈를 제자에게 내보이는 순간과 다르지 않다. 문제는 자신의 붉은 손에 비해 핏기 없는 무명의 손에 종구가 놀란다는 데 있다. 그는 눈보다 귀를 열었어야 했다. 결국 종구는 삶이 아닌 죽음을 택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직접 죽음을 선택한 건 아니고, 삶의 목소리를 불신하는 바람에 죽음으로 빠진다. 승리한 일본인 악마는 웃음짓고, 실패한 무명은 모퉁이에 넋을 잃고 앉아 있다. 나홍진은 인간의 비극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 <곡성>에서 불신이라는 쉬운 길을 택한 자는, 전작의 그들처럼 죽음에 다가선다. 종구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을까? 아닌 것 같다. 그는 딸의 이름을 부르며 “경찰인 아빠가 잘 해결할게”라고 말한다. 그래서 <곡성>은 코미디가 된다. 인간의 비극에 관한 희극. 나는 울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PS. <곡성>을 처음 보고 나홍진의 현혹하는 기술이 놀랍다고 생각했다. 한번 더 영화를 보면서 나홍진이 나를 속인 부분은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는 거짓 손놀림으로 나를 속인 게 아니었다. 감독은 어떤 의미에서 신(A god, not the God)이 되어야 한다. <곡성>에서 그는 게임을 벌이는 두 초보 귀신들 위에 군림한다. 일본인과 일광은 승리의 전리품인 양 사진을 찍는다. 기실 그들의 카메라가 궁극적으로 마주한 것은 나홍진의 카메라였을 터, 악마의 영혼마저 포착한 자는 바로 그다. 가히 작은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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