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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여기에 없었다>, 린 램지가 죽음을 영화에 끌어들이는 법

죽음을 견디다

린 램지는 <케빈에 대하여>(2011)에서 소년의 얼굴에 살인마의 초상을 겹쳐놓는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조합이지만 그녀에게 삶이란 그런 것 같다. 있어서는 안 되는 곳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생생히 박혀 있는 살풍경이야말로 삶의 민낯이 아닌가. 그 불협화음 앞에서 당신은 무얼 할 수 있느냐고 린 램지는 묻는다.

그녀의 신작 <너는 여기에 없었다>(2017)에는 다양한 ‘겹침’이 등장한다. 남자의 목소리 위로 소녀의 목소리가 겹쳐지고, 음악의 선율 위로 다른 선율이 겹쳐진다. 그러나 분별없이 겹쳐지는 그 풍경은 조화롭지 않다. 조(호아킨 피닉스)가 니나(예카테리나 삼소노프)를 구출하기 위하여 성매매가 벌어지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던 장면을 생각해보자. 어두운 복도를 비추던 CCTV에 한 소녀가 홀연히 나타난다. 원피스를 입고 자박자박 걷는 소녀의 여린 실루엣은 이 지옥 같은 건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장면이 진정 공포스러운 이유는 복도와 소녀 사이의 그 지독한 부조화가 그녀가 견뎌야 했을 폭력의 깊이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때로 영화 위로 ‘사진’이 겹쳐진다. 조는 여자들의 사진을 찍어주다가, 그녀들의 얼굴이 사진처럼 굳어버리는 환영을 본다. 그 이후에도 입을 벌린 채 굳어 있는 기묘한 얼굴은 영화에 자주 출몰한다. 한참 뒤에야 우리는 멈춰 있는 얼굴들의 의미를 알게 된다. 조는 과거 전장에서 죽은 채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시체들을 목격하였으며, 그에게 정지된 상태는 죽음에 가까운 것이다. 그리고 린 램지는 이 정지된 상태를 사진과 같이 포착한다. 사진처럼 멈춰 있는 영화. 이것은 ‘활동’ 사진으로서의 영화가 죽음을 맞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스스로를 정지시키며 죽음과의 접속을 시도한다고. 불협화음을 통하여 세상을 사유하던 린 램지는 <너는 여기에 없었다>에 이르러 영화를 정지된 사진 이미지와 겹쳐 놓는다. 우리는 영화가 활동을 중단하는 그 찰나의 순간을 통하여 삶 속에 박힌 죽음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조와 니나는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정지된 순간에 저항한다. 카운트다운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차례로 작아지던 숫자들에 대해서 말이다. 처음 조가 니나를 만났을 때, 그녀는 가만히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다. 아마도 그녀는 이 건물에 갇힌 채로 숫자를 세며 범죄의 순간들을 견뎠던 것 같다. 이 장면은 우리를 영화의 시작 장면으로 다시 인도한다. 칠흑 같은 어둠을 배경으로 카운트다운을 하는 조와 니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장면에서 둘의 목소리가 없다면 영화는 그저 정지된 암흑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조용히 들려오는 숫자의 나열을 통하여 영화의 진행을 감각하게 된다. 어쩌면 카운트다운은 정지된 영화를 진행시키려는 조와 니나의 비밀스런 주문이 아닐까. 그들이 숫자를 세는 방법이 ‘카운트업’이 아닌 ‘카운트다운’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셋, 둘, 하나, 영. 무한대를 향하여 확장되는 카운트업과 달리, 카운트다운은 언제나 영으로 수렴한다. 여기에는 지난한 폭력의 시간도 언젠가 끝이 나리라는 그들의 희망이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조와 니나는 자주 정지된 것들을 흐트러뜨린다. 소파에 기대어 자는 체하던 노모는 조가 곁에 다가오자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그녀는 잠든 사이에 킬러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다시는 깨어나지 못한다. 어쩌면 여태 노모의 활동을 지속시킨 것은 조의 존재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가 처음 니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죽은 듯이 잠들어 있다. 그리고 조의 손이 잠든 얼굴을 부드럽게 흔들어 깨운다. 이때 조는 잠든 니나의 얼굴 옆에 사진을 나란히 두고서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린다. 니나가 눈을 번쩍 뜰 때, 그녀는 마치 사진 속에 갇혀 있다가 현실로 돌아온 것처럼 느껴진다. 조의 손이 정지되어 있던 니나에게 움직임을 되돌려준 것이다. 곧이어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가 등장한다. 니나는 조의 차에 타고 있다. 그녀의 몸은 맥없이 늘어진 상태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니나는 손을 들어 차창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납치, 성매매, 청부살인과 연결되며 무겁게 눌려 있던 이 장면의 공기는 그녀의 손길 아래 부드럽게 흩어진다. 이 장면이 감동스러운 이유는 단순히 그 손짓이 우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폭력 아래 무력하게 정지되어 있던 한 아이가 몸을 일으켜서 ‘움직임’ 자체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경직된 영화를, 그리고 잔혹한 현실을 어루만지는 그 손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다음 장면, 니나는 방 안에 마치 조각처럼 앉아 있다. 조가 다가와서 니나의 머리와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그 순간 얼어 있던 분위기가 풀어지며 이 공간에 미약한 생기가 돈다. 이때 조의 손짓은 노모를 깨우고 차창을 쓰다듬는 몸짓과도 닮았고, 앞서 언급한 카운트다운과도 연결된다. 영화가 활동을 중단하고 죽음을 응시할 때, 조와 니나는 잠든 영화를 흔들어 깨우고 여기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렇게 그들은 끊임없이 마주치는 죽음의 순간을 견디고 다시 삶을 이어간다.

현실과 환상 사이

식당에서의 마지막 시퀀스는 영화 전체를 압축해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조와 니나는 어디로 갈지 고민하지만 답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굳은 얼굴이 다시 영화에 정적을 불러온다. 그 순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홀로 남은 조는 환상 속에서 죽음을 택한다. 그리고 다음 순간, 조의 머리에 얹은 니나의 손이 그를 현실로 복귀시킨다. “일어나요, 조. 아름다운 날이에요.” 조가 끊임없이 죽음의 충동을 느낀 것을 알고 있지만, 영화가 이토록 분명하게 죽음과 삶을 교차해서 보여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개연성을 따지자면 이것은 조의 환상에 불과하지만 이번만큼은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들을 그대로 믿어보는 것은 어떨까. 조는 진정 죽음을 맞았다가 니나의 손길 아래 되살아났다고 말이다. 문득 삶이 정지되고 죽음이 찾아왔을 때, 상대를 호명하고 흔드는 몸짓은 삶을 되돌려놓는다. 이것은 조가 처음 니나를 만났을 때 죽은 듯 잠든 그녀에게 건넨 것이며, 마지막 순간에 죽어 있는 조에게 니나가 건네어준 것이다. 카운트다운은 그 순간을 기다리기 위하여 존재한다. 환상이 현실을 뒤덮을 때, 죽음이 삶을 잠식할 때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누군가의 옅은 손길이라고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말하는 듯하다.

영화가 끝나면 그들이 앉았던 식탁 자리는 텅 비어 있다. 조와 니나는 어디로 갔을까. 새로운 행선지를 찾아서 떠났나. 아니면 환상 속으로 사라져버렸나. 식탁의 풍경은 사진처럼 정지되어 있고 그 뒤로는 식당 직원들의 움직임이 보인다. 다시 한번 사진과 영화가 겹쳐지는 순간이다. 죽음은 이렇게 평범한 어느 날에 식당 한 모퉁이에서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텅 빈 식탁의 무거운 정적을 견디는 것은 관객인 우리의 몫이다. 그러나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조와 니나의 몸짓이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았으니. 머리를 흩뜨리는 투박한 손. 차창을 쓰다듬는 여린 손길. 아마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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