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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도서 - <핫 밀크>
이다혜 사진 오계옥 2023-11-21
데버라 리비 지음 / 권경희 옮김 / 비채 펴냄

“내 꿈은 끝났다.” 최우등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석사과정으로 성취가 이어졌으나 로즈가 병이 나 박사과정을 중도탈락하면서 꿈은, 끝났다. 로즈는 주인공 소피아의 어머니인데 ‘간헐적 다리 마비’라는 원인 불명의 통증으로 걷지 못한다. 아버지가 그들을 떠난 뒤, 로즈는 소피아를 위해 살아왔다. 집을 저당잡힌 그들은 스페인 남부의 고메즈 클리닉에서 다리 통증 치료를 위해 애쓴다. 이 신비한 클리닉은 무엇을 하는지 알기 어려운 곳으로(고메즈가 돌팔이는 아닐까 우리는 의심하게 된다), 소피아와 로즈는 해변 별장을 빌려 지낸다. 소피아는 그곳에서 후안, 그리고 잉그리트와 성관계를 갖는다. 잉그리트는 소피아에게 “사랑받는”이라는 글자를 수놓은 옷을 선물하는데, 이 글씨가 사실은 “머리 잘린”이라는 뜻임을 소피아는 뒤늦게 깨닫는다. “내 실크 톱에 수놓인 ‘사랑받는’은 유로라는 단어보다 내 삶을 더 많이 바꿨다. ‘사랑받는’은 무대 한가운데에 꽂히는 스포트라이트 같았다.” 하지만 그 단어가 ‘머리 잘린’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나면 궁금해진다. 무엇이 그녀의 삶을 바꾸었는가. 혹은, 그녀의 삶은 과연 바뀌었는가. 소피아는 거의 기억이 없다시피 한 그리스의 아버지와 그의 새로운 아내, 그들의 어린 딸을 만나러 짧은 여행을 떠난다. 부유한 아버지가 그녀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도록 도울 수 있는지 타진하지만 때마침 불어닥친 그리스 금융위기 탓인지 아버지의 몰인정함 탓인지 그대로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된다.

<핫 밀크>의 주인공은 웨이트리스이고, 석사학위 소유자이며, 어머니의 간병인이고, 버림받은 딸이다. 소피아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자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인간관계는 모든 것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자신이 배운 지식들은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만 길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상황을 통제하려는 노력은 언제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피아는 마음의 중심을 찾아나간다. 그리스 신화, 언어, 인류학적 통찰이 스쳐지나며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하나의 블랙코미디처럼 비추어낸다. 뛰어난 심리극으로 보기에 손색이 없다. 한국에서는 에세이 <살림 비용>으로 알려진 데버라 리비의 소설로, 2016년 맨부커상 파이널리스트에 올랐다.

249쪽

신도 내 아버지도 내 삶의 플롯에 개입할 수 없다. 나는 전형적인 이야기에 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