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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우 평론가의 '봉명주공'
오진우(평론가) 2022-06-01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재개발 다큐멘터리 장르에서 나무라는 빈틈을 찾아낸 것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한국의 재개발 다큐멘터리는 그동안 무엇을 담아왔을까? 재개발 지역으로 선포되고 자신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의 상실감과 주거권을 위한 투쟁의 장을 먼저 담아내왔다. 그런데도 그곳에 가장 먼저 지워지는 존재는 사람이었다. 재개발 지역은 건물 벽면에 스프레이로 적힌 단어대로 ‘공가’가 된다. 카메라는 아직 떠나지 못한 존재들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쉽게 떠나지 못하는 영역성 동물인 고양이가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움직이지 않는 사물에도 관심을 보였다. 아파트 내부나 곧 철거될 건물의 불안감을 담아내는 재치도 보였다. 그러는 와중에 감독의 모습도 다양해졌다. 한때 감독은 주민들과 함께 투쟁하는 카메라를 든 액티비스트의 면모를 보였다. 그러다 어느새 카메라 앞에서 뒤로 물러나며 최근엔 비인칭적인 시선으로 재개발 지역을 담아내며 현대미술 작가처럼 보이기도 했다.

영화 제목은 비워뒀다. 수많은 영화가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다양하게 변주해온 재개발 다큐멘터리 장르에서 <봉명주공>은 무엇을 담아냈을까? <봉명주공>은 재개발이 착수되기 직전의 봉명주공아파트 단지의 마지막 사계절을 담아낸다. ‘2020년 봄’에서 시작한 영화는 플래시백하여 ‘2019년 여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을 지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영화가 같은 시간의 봄을 겹쳐보는 것은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이유는 단지 내의 사계절의 순환이 아이러니하게 만물이 태동하기 시작하는 봄에 마지막 인사를 고하기 때문이다.

재건축 앞둔 아파트 단지의 자연을 담아내다

사계절, 즉 1년이라는 시간의 변화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자연이다. 그 안에서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나무다. 나무는 단순히 영화가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다. 나무는 영화가 기록하는 봉명주공아파트를 바라보는 하나의 프리즘이다. 나무라는 생태학적 프리즘으로 영화는 재개발 이슈보다는 그로 인해 사라져가는 것에 주목한다. 물론 재개발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는 어르신의 인터뷰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투쟁의 대상으로 재개발을 그리지 않는다. 김소희 평론가가 <집의 시간들> 평론에서 지적했던 “어쩔 수 없음”은 주민들이 공유하는 상황이다.

어쩔 수 없이 정든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 수 있다는 것은 나무로 치면 뿌리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뿌리는 나무처럼 생존이 달린 문제는 아니다. 영화는 생존 다음으로 채워지는 무언가를 담아내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을 풍족하게 하는 추억이다. 추억은 누군가와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뿌리처럼 뻗어 서로를 연결하는 일종의 네트워크다. 영화는 가족간의, 이웃간의 추억을 담아낸다. 여기서 재미난 지점이 이웃간의 추억이다. 그것은 아파트의 형태에 기인한다. 봉명주공아파트는 ‘아파트’란 이름에 걸맞지 않게 작다. 1층, 2층, 5층 높이로 어떤 건물은 나무보다 작다. 라이프 가드닝 모임 ‘모두의 정원’을 이끄는 조경 디자이너 홍덕은은 버드나무를 보며 수간 폭만큼 나무의 뿌리가 펼쳐져 있고 따라서 장거리 운반도 어렵다고 말한다. 먼저 지어진 서울의 둔촌주공아파트는 5층, 10층 높이로 그곳을 다룬 다큐멘터리영화 <집의 시간들>에서 한 주민은 이웃간 경계심이 있었다고 말한다. 아파트를 나무처럼 크게 짓는다고 뿌리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높이가 낮을 때 추억이 생기기 좋은 환경이 조성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공간에서 주민들은 같이 살구도 따고, 김장도 담갔다. 영화는 추억을 단순히 주민들의 증언으로만 기록하지 않는다. 사진이란 물리적 형태로 기록한다.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다는 흔한 말이 정든 곳을 떠나야 하는 봉명주공아파트에서 유효한 말처럼 들린다. 사진은 추억으로 향하는 하나의 매개체다. 영화는 촬영 도중 우연히 사진 동호회 작가들을 만났고 그들의 활동을 영화에 담는다. 이들이 찍은 사진들도 영화에 삽입된다. 여기에 주민들의 과거 사진들도 삽입되면서 봉명주공아파트에서의 마지막 1년이란 시간은 그 시간을 초과한다. 이는 시간을 길게 보존하고 싶은 인간 욕망의 산물이기도 하다.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도 동일하다.

<봉명주공>은 기록에 관한 기록이다. 3개 팀이 재개발 지역을 기록한다. 영화, 사진 동호회 그리고 라이프 가드닝 모임 ‘모두의 정원’이 그것이다. 영화는 나머지 두팀의 기록을 끌어들인 구조를 선보인다. 영화와 사진은 무언가를 담는 순간 과거가 된다. <봉명주공>이 사진을 활용해 과거와 현재를 몽타주하는 방식만 선보였다면 흔한 영화였을 것이다. <봉명주공>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라이프 가드닝 모임 ‘모두의 정원’의 몫이 크다. 조경 디자이너 홍덕은의 말을 통해서 영화가 살아나는 측면이 있다. 홍덕은은 이 팀을 이끌고 단지를 돌면서 식물들을 설명한다. 이것에 멈추지 않고 나무나 꽃을 캐 다른 곳에 이식한다. 그의 행위는 재개발과 함께 삶이 정지됐을 식물의 삶을 연장시킨다. 봉명주공아파트를 추억하는 배경으로 존재하던 식물들은 이식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으로 살게 된 것이다. 이 식물들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미래로 뻗어나간다. 이 때문에 영화가 끝나고 생각나는 것은 그녀가 옮겨 심은 식물들이다.

추억의 매개물들

물론 자본의 논리에 의해 수익이 될 만한 나무들도 이식의 절차를 밟는다. 영화는 이식과 주민들의 이사 과정을 몽타주한다. 한 주민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썼던 편지를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찍는다. 편지는 코팅되어 벽에 걸려 있다. 그녀는 못내 아쉬워 편지를 도로 가지고 나온다. 코팅도 오래 보존하기 위한 과정이었을 텐데 떠나는 순간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주민의 선택을 동의하는 듯하다. 영화를 구성하는 주된 것은 손으로 감각할 수 있는 물리적 형태인 사진과 나무다. 이중 몇몇은 봉명주공아파트가 사라지고도 살아남아 그곳을 추억하는 매개물이 될 것이다.<봉명주공>이란 영화 역시 주민들에게 이곳을 추억하는 매개물이 될 것이다. 그것에만 영화가 머문다면 확장성이 부족하다는 뜻일 것이다. <봉명주공>은 확장성을 갖는가? 나의 경우 영화의 마지막에 폐허가 된 아파트의 모습에서 옛 동네가 떠올랐다. 그 동네는 <무산일기>에 나온다. 평탄화 작업이 이뤄지기 전 골목길이 살아 있을 때를 영화가 포착했다. 그 길을 보면 허물어진 옛 동네가 머릿속에서 복원된다. 그런 의미에서 <봉명주공>은 주민들의 기억으로 꽉 찬 느낌을 준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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