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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플로우의 딥포커스] '8마일'과 진짜 힙합

힙합과 랩이 한국 대중문화에 스며들기 시작할 즈음인 2000년대 초. 한국에서 힙합은 유행이지만 유행이 아니었다. 밑단을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던 힙합 바지가 당대 최고로 먹히는 핫한 패션이었어도 정작 힙합 자체가 뭔지 사람들은 잘 몰랐고 알 필요도 없었다. 누군가는 힙합을 그저 바지통 사이즈로 알고 있었을 것이며 랩은 미국에서 건너온 과장된 제스처, 알아듣기 힘든 시끄러운 음악일 뿐이라고 퉁쳐지던 시절. 20년이 지난 현재에 비하면, 그때는 ‘힙합의 대중화’라는 것이 얼마나 먼 이정표였을까. 그런 세상의 무관심과 오역 속에서도, 음지에 모여 있던 힙합 팬들은 그 나름대로 분주하게 형성됐다. 물론 모든 건 온라인에서의 일이다. 사실 한국 힙합의 근원은 PC통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수입 문화니까. 예나 지금이나 힙합 커뮤니티를 불태우는 큰 화두가 있다. 그건 바로 ‘진짜 힙합’에 대한 담론이다. TV에 나오는 메이저 래퍼와 홍대 언더그라운드 래퍼 중 누가 더 리얼한지를 따지는 논쟁은 힙합 신의 오랜 단골 소재다. 거기에 부응하듯 래퍼들 역시 링 위에 선 것처럼, 언제나 경쟁적인 랩 가사를 뱉으며 저마다의 리얼함을 증명해왔다. 명쾌한 정답은 없었다. 진짜를 갈망하는 한국 힙합의 내부는, 실은 그렇게 오랜 세월 기초공사 중이었다. 리스너든 플레이어든 우린 모두 학생이었다.

아마추어 래퍼 지망생이었던 난 뜻이 맞는 친구 몇명과 크루를 결성하고 같이 어울려다녔다. 어설픈 작업물이라도 만드는 날엔 뒤풀이한답시고 술판이 벌어졌다. 갓 스무살 또래들이 주머니에서 5천원 정도씩을 꺼내면 소주 몇병 시켜놓고 밤새도록 힙합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역시 주된 안주는 ‘리얼 힙합’에 대한 얘기였다. 저마다의 추상적 궤변이 쏟아지고 언성이 높아질 때도 있었지만 그 시절 우리에겐 클럽에 가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즐거움이었다. 물론 해답이 나올 리 없었다. 그 시기 힙합 커뮤니티를 떠들썩하게 만들 만한 반가운 뉴스가 들려왔다. 래퍼 에미넴 주연의 영화 <8마일>의 개봉 소식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이런 힙합 소재의 콘텐츠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고 당대 최고의 래퍼를 주인공으로 한, 러닝타임 내내 랩과 힙합이 가득한 영화를 극장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건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공개된 짧은 예고편에 나오는 모든 요소가 우리의 결핍돼 있던 힙합 뽕을 최대치로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당연히 <8마일>은 그 시즌 우리의 최대 관심사가 됐다. 개봉일에 맞춰서 나와 친구들 네명은 종로 서울극장으로 향했다. 관람석의 90%가 빈자리였고 멀찌감치 힙합 패션의 시커먼 남자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힙합의 비인기를 다시금 씁쓸하게 체감하며 영화는 시작됐다. 디트로이트 빈민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래퍼 비-래빗의 이야기. 백인 극빈곤층인 주인공은 어린 여동생, 알코올중독자 어머니와 함께 컨테이너 트럭에서 살아가고 있다. 재능 있는 랩으로 하루빨리 성공해 동네를 벗어나고 싶지만, 현실의 벽은 높기만 하다. 그리고 유명한 명대사.

“이상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

두 시간의 상영시간이 끝난 뒤 극장 밖을 나서며, 우리의 표정은 거의 영화의 주인공 비-래빗에 빙의돼 있었고 비장할 만큼 진지한 말투로 감상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입을 모아 말했다. “이게 진짜 리얼 힙합이다.” 그때 우리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던 것인가. 극중 비-래빗이 처한 상황은 시궁창 그 자체다. 백인이 랩을 한다는 이유로 인종차별을 당하기 일쑤고, 재능을 시샘하고 사기 치려는 친구, 바람 피우는 애인, 심지어 철없는 어머니까지. 친구 몇을 제외하고는 주변이 온통 적이다. 이 고립된 환경을 타파할 수 있는 건 오직 그의 랩뿐이다. 영화는 주인공이 이 모든 갈등을 이겨내는 과정을 ‘랩 배틀’이라는 형태의 경쟁 도구를 사용해 풀어낸다. 상대방을 얼마나 잘 디스하고 자신의 우위를 과시하느냐로 승패가 결정되는 랩 배틀에서 비-래빗은 다소 특이한 승부수를 둔다.

I know everything he’s got to say against me(네가 뭐라고 입 털지 난 파악 다 했지)

I am white, I am a *uckin, bum(흰둥이에다가 인생 말아먹고)

I do live in a trailer with my mom(엄마 집에서 밥만 축냈어)

My boy Future is an Uncle Tom(백인 꽁무니 쫓는 내 흑인 친구와)

I do got a dumb friend named Cheddar Bob(자기 다리 총 쏜 멍청한)

Who shoots himself in his leg with his own gun(체다 밥을 친구로 뒀던 나)

I did get jumped by all six of you chumps(난 너희 여섯명 때문에 맞아서 굴렀고)

And Wink did *uck my girl(윙크는 내 여친을 빼앗았지)

but I’m still stand in, here screamin, ‘*uck The Free World’(하지만 아직도 여기서 외쳐, ‘엿먹어 프리월드’)

자신의 약점과 치부를 가사에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상대가 할 말이 없게 만드는 비-래빗의 전략은 정확히 먹혀들었고 배틀의 승부를 결정짓는다. 영화를 보는 모두가 진정한 ‘리얼 힙합’의 승리를 목격하게 되는 순간이다.

초보 래퍼들이 범하기 쉬운 실수가 있다. 멋져 보이는 가사를 쓰기 위해 글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필요 이상으로 현학적인 표현과 알맹이 없는 빈껍데기 가사들로 많은 마디를 낭비해버린다. 그 시절 나 또한 그랬다. ‘진짜 힙합’을 표방하기 위한 나의 비장한 각오를 거창한 단어로 포장하다 보면 결국엔 어설픈 출사표 같은 랩 가사만 써내기 일쑤였다. 하지만 힙합의 진정한 멋은 솔직함에서 비롯된다. 그 암묵적 규칙은 <8마일> 이후 본격적으로 개정됐다. 솔직함이 곧 리얼함으로 귀결된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래퍼 중 한명으로 남겨질 에미넴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통해 오랫동안 회자될 힙합영화의 정수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아직도 래퍼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되어준다. 그가 작품에서 보여준 ‘솔직함’이라는 필승법은 후에 여러 아티스트와 많은 작품들에 영향을 끼치며 곳곳에 <8마일>이라는 DNA를 남겼다. 우리 세대 힙합 키즈들이 그토록 열망하던 ‘진짜 힙합’에 가장 근접한 시청각 자료인 <8마일>. 20년 전 바다 건너 비-래빗이 전해준 메시지와 해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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