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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의 오늘은 SF] 담백한 '위험한 게임'

<위험한 게임>

인공지능이 너무나 발전한 나머지 반란을 일으켜 사람들을 지배한다는 이야기는 지루하다. 이런 이야기는 이미 너무 많이 나왔다. 그나마 발상이 자연스럽다면, 많이 보던 이야기라도 그러려니 할 텐데 이런 소재는 밑바탕부터가 답답한 이야기다. 왜 인공지능이 할 일 없이 사람을 지배하려고 하겠는가? 사람들 중에 굳이 남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 까닭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본능을 갖고 살다 보니, 남이 굽신거리면서 좋은 말로 떠받들여주면 우쭐해하는 습성에 도취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판단을 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그런 데 관심이 있을 거라고 막연히 짐작하는 것은 따분하다.

나는 초등학생 때 돈이 많은 부자들은 집 창고에 새우깡을 500개 정도 쌓아놓고 언제든지 마음대로 먹을 거라는 상상을 했다. 인공지능이 뛰어난 능력으로 고작 사람이라는 종족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할 거라는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은 그 정도 상상력인 것 같다. 혹시 길 가다가 바닥을 돌아다니는 개미들이 나를 떠받들어주고 매일 나를 칭송하는 개미 춤을 춰주기를 바라면서 개미들을 정복하려고 해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보도블록 새에 난 잡초들이 모두 나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가? 인공지능과 사람의 차이는 사람과 개미, 사람과 잡초의 차이보다도 크다.

우리는 무심코 인공지능과 로봇을 우리의 부하나 노예처럼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니까 노예가 주인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옛 이야기들에 워낙 친숙하다 보니, 그저 인공지능의 반란 이야기도 자주 떠올리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뛰어난 인공지능이 언제나 안전하며, 영원히 우리의 친구로만 남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빠르게 발달하는 강력한 기술은 항상 그만한 위험을 갖고 온다. 사람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일을 쉽게 해내는 인공지능이 어느 날 갑자기 고장이나 오작동을 일으켜서 알 수 없는 행위를 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런 상황에서 지식이 부족한 사람은 손을 쓰기가 어렵다. 이것은 이미 복잡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사람들에게 오늘 당장 두렵게 다가오는 문제다. 어쩌면 대단히 복잡한 문제를 처리하는 인공지능이 오작동을 일으킨다면, 사람은 그 오작동을 고치기는커녕 오작동이 정말 오작동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다.

1983년작 <위험한 게임>은 바로 이런 소재를 활용해 만든 영화다. 이 영화에서 인공지능 컴퓨터는 미국의 핵무기들을 통제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 시절, 미군의 적수는 지금은 사라진 소련이라는 나라다. 만약 소련이 핵무기로 미국을 기습 공격하는 바람에 미군이 대혼란에 빠져 적절한 반격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 기세를 타고 소련은 빠르게 후속 공격을 성사시켜 미국을 정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미군은 인공지능 컴퓨터에 핵무기들을 연결해두었다. 설령 미군 병사 중에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도, 지하 깊은 곳에 숨겨놓은 컴퓨터가 자동으로 판단해 소련을 핵공격하도록 만들어놓았다. 이렇게 해야만 소련이 감히 미군의 빈틈을 노려 기습할 꿈을 못 꿀 테니, 이 컴퓨터로 전쟁을 예방하고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발상이다. 이렇게 보면, 이 영화는 1980년대 레이건 정부 시기, 소위 신냉전이라고 하면서 갑자기 몇년간 미국과 소련의 대치가 심해졌던 시대상을 나타내는 영화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오작동을 일으킨다. 그래서 전쟁 상황이 아닌데도 핵무기를 세계 곳곳에 발사하려는 위기를 겪게 된다. 사람들은 컴퓨터를 멈추려 한다. 그러나 컴퓨터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자신의 공격을 성공시키도록 설계되어 있다. 때문에 인공지능의 실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모든 사람의 간섭을 물리치고 어떻게든 공격을 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만약 누군가가 컴퓨터의 전원선을 뽑으려고 하면 그 순간 컴퓨터는 최악의 위험이 발생했다고 보고, 배터리를 이용해 즉시 모든 핵무기를 발사해버리는 비상 장치를 가동한다.

<위험한 게임>에는 이 이야기에 다른 소재 하나를 더 걸쳐놓았다. 컴퓨터 해커와 해킹 이야기다. 사실 이 영화의 중심 소재는 이 대목이다. 천재 해커가 국방부 정보망에 들어와서 핵무기에 관한 정보를 마음껏 쓸어담아 가는데, 추적하고 또 추적해봤더니 어이없게도 다락방에서 컴퓨터를 붙들고 사는 고등학생이었다는 유의 이야기 말이다. 1980년대에 스티브 워즈니악,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같은 20대, 30대의 앳된 젊은이들이 급격히 발달하는 IT 산업에서 억만장자가 되는 일이 벌어지자 이런 이야기는 더 가깝게 다가왔고 더 생생하게 보였다. 그래서 더 인기를 얻은 영화다. 이 영화는 이런 주제의 영화로 풀어나갈 수 있는 소재들을 차근차근 순리대로 배열해서 그럴듯하게 촬영해 착실히 보여준다. 이런 이야기에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대로 문제가 해결되면 이야기는 끝이 난다. 소재와 중심 내용이 재미있으면 그렇게 착실히 풀어내는 것만으로 충분히 재미있고 즐겁다.

나는 핵심에 집중해서 내용을 잘 보이게 풀어낸 것이 이 영화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괜히 사실은 주인공이 어릴 때 아버지가 악당에게 비참하게 당한 사연이 있어서 그때 맺힌 한 때문에 컴퓨터 달인이 되었다는 사연이라든가, 관객을 흥분시키기 위해 쓸데없이 악당이 잔인한 짓을 하는 걸 장황하게 보여주는 따위의 장면이 없다. 1980년대에 처음 컴퓨터에 빠져들었던 사람들이 이 영화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종종 실리콘밸리에서는 이 영화의 상영회가 열린다고 한다. 소재를 담백하고 충실하게 풀어낸 SF의 힘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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