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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플로우의 딥포커스] ‘트레이닝 데이’가 힙합인 이유

고등학생 시절 학교에서는 주기적으로 특강을 열었다. 작가, 배우, 가수, 방송인 등 각계의 유명인사들이 초청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꽤 운 좋은 경험이었다. 한번은 <20대에 하지 않으면 안될 50가지> 저자인 일본의 유명 작가 나카타니 아키히로가 초대됐다. 정신이 산만했던 내가 그날따라 통역사까지 붙은 강연을 집중해서 들을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았다. 어쩌면 흔한 자기계발서에 나올 법한 내용이었겠지만 나처럼 어린 친구들의 사고를 확장해줄 만한 조언들도 분명 있었다. 예를 들어 ‘노래를 감상할 때 악기 하나하나를 따로 반복해서 들어보라’는 팁은 훗날 음악을 하게 될 나에게 나름 실용적인 원 포인트 레슨이었다. 또 하나 뇌리에 박혔던 이야기는 ‘매일 영화를 세편씩 보라’는 말이었다. 창작자로서 시야를 넓혀준다는 맥락의 조언이었을 것이다. 어째서인지 당시 나와 친구들은 강연 이후 한동안 그 말에 꽂혀 있었는데 정말로 하루에 영화 세편씩 보기 프로젝트를 강행했다. 그것은 마치 훈련과 같았다.

우리 대부분은 작가나 감독이 꿈이었기 때문에 체육부의 팔굽혀펴기처럼 영화를 감상했다. 방과 후 비디오 대여점으로 몰려가 테이프를 잔뜩 빌려오거나 주말이면 종로 정동극장에서 세편씩 마라톤 상영을 하는 심야영화 티켓을 끊고 밤을 새웠다. 그리고 그건 너무 무식한 방법이었다. 대부분의 스토리가 기억이 나지 않을뿐더러 가관으로 뒤엉켜버렸다. 그 훈련은 자연스럽게 하루 세편이 한편으로, 또 일주일에 한편으로 줄었지만 돌아보면 오늘날 매일 밤 넷플릭스를 뒤적거리는 내 모습이 그 시절의 관성처럼 느껴진다. 그날도 어김없이 최신 비디오테이프 몇개를 빌려온 우리는 기숙사 방에 모여앉아 감상을 시작했다. 짚이는 대로 가져온 테이프 중에 영화 <트레이닝 데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태어나 처음 감상한 이쪽 장르영화였다.

안톤 후쿠아 감독의 2001년작인 <트레이닝 데이>는 청춘 스타 시절의 에단 호크와 아직은 주름이 없는 덴절 워싱턴 주연의 본격 후드·갱스터·힙합·버디 영화다. LA 도심을 배경으로 신참 형사가 베테랑 선배 형사와 팀을 이루게 된 첫날, 딱 하루 동안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에단 호크가 연기한 풋내기 형사 제이크는 위험천만한 LAPD 마약반에 배정되고, 사수인 알론조(덴절 워싱턴)의 의심쩍은 눈총을 받으며 첫 근무를 나선다. 거친 외모와 말투를 가진 알론조는 LA 뒷골목 깡패들과 마약상들에겐 공포의 대상으로, 사실상 그의 위상은 형사라기보다 조직 보스가 어울릴 정도로 악명 높았다.

“양들을 보호하려면 늑대를 잡아야지. 그리고 늑대를 잡기 위해선 다른 늑대가 필요한 법이야.”

늑대 잡는 늑대를 자처하는 알론조는 제이크에게 LAPD의 지독한 하루를 제대로 맛보여주기로 한다. 형사 훈련의 시작이다. 그런데 그 튜토리얼이 좀 이상하다. 알론조는 10대 청소년들에게 압수한 대마초를 제이크에게 아무렇지 않게 권하고, 범죄 현장에 피해자가 흘린 지갑을 뒷주머니에 챙긴다. 또 단속을 빌미로 범죄자를 협박 갈취하고, 심지어 동료 부패 경찰들과 계획적으로 마약상의 물건을 털고 살인까지 저지른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공범이 돼버린 제이크에게 모든 걸 덮어씌운다. 이만하면 경찰이 아니라 도시 최고의 악당이 따로 없다. 사실 알론조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로 마피아에 살해 협박을 받고 있었고, 그걸 피하기 위한 자금 마련으로 이 모든 걸 계획한 것이다. 그리고 때마침 제이크를 사건에 휘말리게 해 미끼로 삼았다. 그렇게 제이크는 근무 첫날부터 죽음의 함정에 빠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모든 전말을 알아챈다.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인 안톤 후쿠아는 스타일리시한 영상미와 참신한 액션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많지만, 특히 <트레이닝 데이>는 그에게 명성을 안긴 대표작이다. 2000년대 초 미국의 시대 분위기와 젊은 흑인 감독이 만났다는 점도 시너지 효과로 작용했으며 이 영화의 장르 카테고리를 단순 범죄물에서 힙합의 영역까지 자연스럽게 확장한다. 덴절 워싱턴은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아 흑인 사회에 큰 상징성을 선물한다. 닥터 드레, 스눕 독 등 당대의 인기 랩 스타들이 대거 출연하고 미 서부 문화권 특유의 로라이더 자동차가 등장하는 신에서는 명곡 <Next Episode>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온다. 또한 실제 유명 갱 단원들과 그들의 구역이 영화에 그대로 등장하며 LA 뒷골목의 살벌함을 생생하게 담아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데, 이건 상호간 위험을 감수하는 꽤 이례적인 경우로 이 작품의 감독과 주연배우에 대한 흑인 지역사회의 서포트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또 하나 재밌는 비하인드는, 주인공 제이크 역에 에미넴이 캐스팅됐었지만 <8마일> 촬영으로 거절했다는 후문이다. 내가 이 영화를 자꾸 힙합 장르물로 분류하려는 근거는 그러니 충분하다.

다시 그 시절 기숙사로 돌아가서, 제이크가 지옥 같은 하루를 끝내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영화의 뭉클한 엔딩 장면을 결국 나 혼자만 목격했는데, 옆의 친구들은 이미 곯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헐렁한 힙합 패션, 번쩍거리는 목걸이, 흡사 랩을 하는 것 같은 말투와 대사들, 힙합 비트의 배경음악에 눈이 휘둥그레져 새벽까지 엔딩을 좇아간 나와 달리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던 내 친구들은 눈꺼풀이 무거웠을 것이다. 다음날 영화가 얼마나 재밌었고 쿨했는지 열변을 토했고 당연히 녀석들은 내 감흥을 이해할 리 없었다. 그 후로도 계속된 영화 보기 훈련은 여전히 비효율적이고 고됐지만 결국 나에게 소중한 취향을 선물했다. <트레이닝 데이>는 나의 첫 번째 취향이다. 취향이라는 건 처음 뿌리내린 기둥을 따라 가지를 쳐나가는 법이라 시간이 흘러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늘 비슷한 알고리즘을 따라가면서도 새로운 가지를 발견하고 뻗어가는 건 여전히 즐거운 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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