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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FF 3호 [인터뷰] '엄마의 땅' 박재범 감독, “스톱모션은 시간으로 영혼을 만드는 연금술”
이우빈 사진 최성열 2022-10-08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엄마의 땅> 박재범 감독

3년 3개월. 69분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 박재범 감독이 들인 시간이다. 모든 세트와 캐릭터를 손수 만들고, 컴퓨터 그래픽 없이 천이나 스티로폼만으로 오로라와 눈발을 표현했다. 평생 본 적 없는 툰드라의 설원을 공부하려 국내외의 관련 서적, 다큐멘터리를 탐독하고 시베리아를 몇 번이나 직접 오갔다. 한 작품에 쏟은 창작자의 노력을 함부로 가늠할 순 없겠지만, <엄마의 땅>에 깃든 박재범 감독의 시간과 땀이 상상 이상의 양임은 분명하다. 이토록 고된 제작 과정을 버티게 한 주동력은 창작욕과 희열이었다. “힘들고 고통스럽다. 그런데 작업할 때마다, 인형이 움직일 때마다 너무 재밌다”라는 그의 애정 고백엔 영화의 주인공 그리샤에게 느껴지는 순수함의 정서가 한껏 묻어난다.

- 전작 <스네일 맨>에선 사막을, 이번엔 툰드라 설원을 배경으로 삼았다. 이유는?

= 우리에게 익숙한 상황보다는 생명이나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는 극한의 환경을 선택하게 된다. 그런 곳일수록 영화적인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 같다. 또 전작에서 표현했던 감정이나 배경과 정반대의 것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늘 있다. <스네일 맨> 전에 만든 <빅 피쉬>에선 바다가 배경이어서 다음에 사막을 택했고, 그다음엔 반대로 설원의 새하얀 이미지를 떠올리는 식이다.

- 부족 이름이나 ‘숲의 주인’ 전설 등 구체적인 설정은 어떻게 정했나?

= 영화에 나온 예이츠 부족이나 인근 국가는 모두 허구다. 물론 현실을 많이 반영했다. 아예 접해본 적 없는 문화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용어, 배경, 인물의 행동을 조사하기 위해서 몇 번이나 시베리아에 현장 조사를 가야 했다. 도서관에서 툰드라, 시베리아 키워드가 들어간 서적은 모조리 찾아보고 국내외 다큐멘터리를 보면서도 공부했다. 특히 다큐멘터리 <최후의 툰드라>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다큐멘터리를 보면 툰드라 원주민들이 평소에 가족같이 여기던 순록들을 잡아먹곤 한다. 이런 모습이 불편하기보다는 한국에서 된장찌개를 먹는 것처럼 너무 일상적이고 푸근해 보였던 기억이 있다. 자연과 환경을 받아들이며 산다는 느낌이 좋았고, 영화의 분위기나 이미지를 구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래서 <최후의 툰드라>를 만든 책임프로듀서(CP)를 찾아가 많은 조언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 <최후의 툰드라2>를 기획하고 있으니 같이 툰드라에 가자고까지 제안받았는데 코로나 때문에 무산돼 아쉬웠다.

- 숲의 주인이 곰인 이유도 실제 설화에 기반을 한 것인가?

= 맞다. 실제로 시베리아에선 곰을 자연이 형상화한 신성한 존재로 여겨서 곰 가죽을 가져다 놓고 제의를 열기도 한다. 곰을 신성시하면서도 두려워한다는 부분이 영화에서 표현하고 싶은 죽음, 생명, 가보지 않은 세계의 뉘앙스와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또 우리나라의 단군 설화와 비슷하게 곰을 조상으로 여기는 설화가 많다. 곰 가죽을 벗기면 손이나 발 모양, 피부색 등이 사람과 굉장히 비슷해서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영화가 이국적인 이야기이면서도 한국과 비슷한 뿌리의 정서를 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원주민 가족 중에서도 어린 딸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 사춘기 아이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큰 변화의 경계선에 있지 않나. 영화의 이야기도 가족들을 떠나서 미지의 세계를 경험한 인물의 변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두 요소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샤먼이 말해준 숲의 주인 전설만 듣고 주인공이 여행을 떠나기 위해선 아이 특유의 순수함, 용감함, 맹랑함이 필요했다. 또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주인공 그리샤처럼 어릴 적에 어머니가 크게 아팠던 적이 있다. 그때 처음으로 죽음의 두려움과 가보지 않은 세상에 대한 막연함을 느꼈다. 이런 감정이 툰드라의 설원이 주는 분위기, 영화의 이야기와 잘 겹친다고 느꼈다.

-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착취가 주제이기도 하다.

= 연합군의 군인으로 나오는 블라디미르는 본인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의무를 다한다고 생각한다. 점점 강한 책임감에 휩싸이면서 변질해 버리는, 비뚤어져 버린 인물이다. 실제 역사를 보더라도 누군가가 무언가를 지배할 때는 지배 대상의 육체적인 부분을 넘어서 영적이고 정신적인 부분까지 침범하려 한다. <엄마의 땅>에서도 툰드라 땅은 이미 연합군 소속으로 들어간 상황이다. 인간이 땅에 깃발을 꽂은 것만으로 자연을 지배했다는 거다. 하지만 실제로 여기 사는 사람들과 자연, 그러니까 진정한 땅 주인들의 마음은 연합군의 것이 되지 않는다. 결국 연합군이 영적이고 정신적인 영역까지 점령하기 위해서 숲의 주인인 곰을 처치하러 오자 그리샤가 그것을 막는 게 영화의 주된 이야기다.

- 스톱모션 기법을 줄곧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처음엔 단순한 끌림이었다. 스톱모션 작품들의 신비한 분위기가 좋았다. 그런데 실제로 만들어 보면 정말 죽을 맛이다. (웃음) 그래도 오랜 시간을 공들여서 세트, 캐릭터를 만들고 멈춰있는 사물을 손수 움직여보면 애정이 안 생길 수가 없다. 마치 시간을 재료로 해서 캐릭터에게 영혼을 불어넣는 연금술 같다고 생각한다. 관객들도 영화를 보면서 인형이 움직인다는 느낌이 아니라 정말 어딘가의 세계에 있는 인물이 살아 움직인다고 느끼길 바란다. 그러면 나도 성공한 게 아닐까 싶다.

- 불이나 물, 눈과 오로라 같은 자연물 묘사가 정말 뛰어나다. 어떻게 표현하려 했나?

= 절대 CG로 만들지 말자라는 첫 번째 철칙이 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영상 소스의 사용은 최대한 배제하려고 노력한다. 오로라나 눈 모두 직접 촬영한 결과물이다. 오로라를 만들어 보려고 부산진시장에 가서 온갖 종류의 천을 다 떼 왔다. 하나하나 펼치고 합쳐보면서 어떤 게 가장 오로라의 느낌을 낼 지 고민했다. 눈은 스티로폼 알갱이를 썼다. 신 별로 바람이 어느 방향에 어떤 속도로 부는지, 사람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밤인지 낮인지와 같은 경우의 수를 다 나눠서 눈발을 표현했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자연물 묘사는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다. 불, 물, 눈, 오로라나 특히 <엄마의 땅>에선 피의 질감 같은 것을 진짜보다 더 진짜같이 느껴지게끔 만들려고 했다. 평소엔 일상적이고 당연한 자연의 모습이 스톱모션으로 표현하는 순간 무척 새롭게 보인다. 그걸 꼭 표현하고 싶었다.

- 제작 기간이 상당히 소요됐을 것 같다.

= 3년 3개월 정도 걸렸다. 2019년 5월에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 연구 과정으로 시작해서 2020년 1월 23일에 첫 촬영을 했고, 2021년 5월에 촬영이 끝났다. 그리고 1년 넘게 후반작업을 했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제작이 원래 오래 걸리긴 하지만, 예산 문제도 꽤 컸다. 현장 조사 때문에 시베리아에도 가야하고, 장기간 작업하다 보면 예산이 늘어나기 마련인데 애니메이션 업계의 현실 탓에 예산 조달이 쉽지 않았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소수정예의 스태프들이 정말 오랜 시간 고생을 해줬다. 동고동락하며 쌓인 정과 인연이 아주 깊다. 시나리오를 쓰는 와중에 세트, 캐릭터 제작까지 진행하느라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래도 지나고 보면 그렇게 퇴로를 없애고 박차를 가한 덕분에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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