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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교섭’, 실패의 윤리
김성찬 2023-02-15

결국 성공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두고 실패를 운운하는 게 의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인질 두명의 목숨이 희생되긴 했지만 <교섭>은 우여곡절 끝에 나머지 21명을 구출한 성공 이야기 아닌가. 국정원 요원 대식(현빈)만 본다면 영화는 이제껏 봐온 유사 영화의 공식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교섭에 준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중요 인물이 한때 실패한 임무에 따른 트라우마를 극복한 뒤 기어코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성공에 이른다는 이야기는 대식의 경우에도 적용 가능하다. 이라크 인질 구출 작전에서 실패를 맛본 대식은 그때 생각이 때때로 밀려들어와 괴로운데, 비슷한 사건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면서 실패를 만회할 기회를 손에 쥔다. 비록 두명의 목숨을 잃었지만 나머지를 구출하면서 대식은 과거의 실패를 딛고 성공을 이룬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에는 성공의 기쁨보다 실패에 짓눌린 무기력감이 더 크게 작용하는 듯하다. 영화 후반부에 드러난 실패인지 성공인지 단정하기 애매한 순간만 제외하면 영화는 실패의 기록으로 점철돼 있어서다.

네 가지 실패

<교섭>에는 크게 네 가지 실패 사건이 있다. 첫 번째는 외교부 기획조정실장이자 교섭관인 재호(황정민)가 한국인 피랍 사실을 인지한 뒤 방문한 아프가니스탄에서 교섭 장소로 이동하다가 맞닥뜨린 폭탄 테러 사건이다. 이 사건 때문에 재호는 교섭 장소에 다다르지 못해 협상 기회를 놓친다. 두 번째는 미국이나 한국의 통치 체계와 거리가 먼 아프가니스탄 정치 원리인 부족장 회의를 이용해 인질을 구해내려는 시도가 무위로 돌아간 사건이다. 한국 당국이 저들이라 부르는 탈레반이 한국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다면 한국은 탈레반을 과소평가해 선교단을 자원봉사자로 쉽게 위장할 수 있다고 과신한 게 사달이 났다. 이 실패 이후 재호와 대식은 인질 한명의 시체를 발견한다.

세 번째는 매뉴얼이 아닌 자기 방식을 고집하는 대식이 가짜 브로커에게 속아 인질 교환은 고사하고 탈레반 수감자가 아닌 잡범만 풀어준 뒤 가짜 브로커에게 넘어간 돈을 되찾기 위해 허망한 액션을 펼친 일이다. 이후 두 번째 희생자가 생긴다. 세 번째 실패까지를 따라오면 정석의 재호와 편법의 대식이 모두 실패한다는 점에서 영화 <살인의 추억>의 재판 같기도 하다. 마지막 실패는 금기시된, 탈레반과 협상 테이블에 앉아 담판을 짓는 순간이다. 이 에피소드를 실패로 규정한 이유에 동의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에서 나오듯 테러리스트와 협상하는 것은 굴욕 외교이며 국가의 무능을 자인한 일과 마찬가지다. 또 재호의 기백만으로 인질을 구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때 미군이 폭격을 가하지 않았다면 탈레반은 인질뿐 아니라 재호의 목숨도 앗아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엔 인질을 무사히 구출했으므로 성공으로 본다 해도 굳이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인질 석방은 한국의 실패와 무관하지 않으며 탈레반의 실패이기도 한 점은 강조하고 싶다. 종교적 신념을 빙자해 벌인 반인륜적 범죄는 그 목적이 어떻든 실패일 수밖에 없다. 그 종교가 사람을 죽이는 일이 올바르다고 가르칠 리 만무하다. 인질을 볼모로 금전을 취하라고 했을 리도 없다. 더 따지자면 이러한 실패의 원흉은 미국이다. 세계 경찰 노릇을 하던 미국은 선전과 다르게 세계 곳곳에 증오를 심어두었고 그 결과 본토 공격과 자국민 희생이라는 엄청난 실패를 낳았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보복을 자행했지만 베트남 철군에 비견할 만한, 실패로 범벅된 아프가니스탄 탈출을 우리는 보았다. 한국의 실패도 같은 맥락이다. 일단의 종교인들이 여행제한구역에 들어가는 걸 국가는 막지 못했다. 우방을 표방하는 강대국의 기세에 눌려 온갖 비판을 무릅쓰면서도 비전투병력을 아무런 역사적 연고가 없는 이국땅으로 파견해 무장 세력에 공격의 빌미를 주었다. 실패의 계보를 짚어가다 보면 영화는 갖은 부조리와 불합리로 인해 불거진 실패의 기록이라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숨겨진 윤리성

실패의 역사를 담는다고 해서 영화가 비판 의식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다. 오히려 감독은 대중영화의 틀을 적극 차용해 재미를 꾀한다. 서두에 유사 장르영화에서 볼 법한 서사의 골자를 언급하기도 했지만 작품은 이국적 풍경 아래로 임무를 수행하는 요원의 광경을 그렸던 여타 첩보영화와 그 안의 인물을 떠올리게 한다. 현지 통역관 카심(강기영)의 쓰임도 전형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런 영화에서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 만큼의 다양한 실패를 묘사한 점이 눈에 띈다. 감독은 실패를 낳은 부조리와 불합리의 정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려 한다기보다 대중영화의 표면 밑으로 실패를 반복해 제시하면서 어떤 윤리성을 추출하려고 애쓰는 듯하다. 여기서 실패의 윤리로 이름 붙일 만한 윤리성은 주로 개인에게 초점이 있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따위의 격언이나 꺾이지 않는 마음같이 유행하는 언설로 표현할 성질이 아니다. 재호와 대식이 어떻게든 인질의 생명을 구하려는 의지는 개인적 도덕 감정의 발로라 할 만하다. 여건에 따라 인질 구출이라는 임무 완수가 달아났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도덕이 실패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보다 영화는 사회와 집단이 지녀야 할 실패의 윤리를 말하려는 듯하다.

영화가 말하는 실패의 윤리란 우선, 실패 뒤 보복을 감행하는 무모함을 지양하는 일이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벌인 보복 전쟁이 정당하고 마땅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두고 성공한 작전이라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또 실패의 윤리란 실패를 초래한 원인을 반성하거나 개의치 않고 이익만 좇는 무책임함을 멀리하는 일이다. 영화에 드러난 실패의 다른 한축은 아프가니스탄 내 친미 정권이다. 영화 속 교섭 사건에 직면한 그 당시의 반탈레반 정권도 그렇지만 2021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도망치듯 나올 때의 정권은 탈레반이라는 존재의 실패에 자기 책임은 없다는 듯이 군다. 한국인 인질의 생명은 크게 고려하지 않고 테러리스트와 협상하지 않는다는 입장만 고수하는 아프가니스탄 정권은 시간이 흘러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해나갈 때, 비유이자 실제로 그간 미국을 등에 업고 불법으로 축적한 재산을 챙기는 데 급급하다 못해 활주로에 흘리면서 나온다. 그들에게 반성과 회한의 기미는 없고 이익 추구만이 전부인 듯 보인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실패를 없는 셈 치는 행각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게 실패의 윤리를 성찰하는 일이라 주장한다. 한국 정부는 인질 구출을 위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미국이 설계한 군사작전에 동의하면서 피랍 사태를 없던 일로 여기려 든다. 실패를 결단코 잊으려 한다면 같은 실패는 반복할 수밖에 없어 비윤리적이다. 정리하면 실패의 윤리란 현상을 정확히 인식하고 뼈저리게 기억하는 토대 위에서 이익이나 보복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공생을 모색하면서 다음을 대비하는 일이라 할 것이다. 또 영화는 재호와 대식이라는 두 인물이 연속하는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보복이나 근시안적 이익의 유혹에 휘둘리지 않을 뿐 아니라 쉽게 없던 일로 치부하지 않으려 했던 태도를 승화해 집단이 관철해야 할 실패의 윤리를 역설한다.

실패의 윤리가 지닌 본질은 그다음 무대를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재호가 또 다른 피랍 사태를 맞이하는 장면으로 영화를 끝낸 것은 의미심장하다. 대식은 실패의 윤리가 그다지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세계로 자진해 들어가면서 다시 시험대에 오르는 건 재호뿐이다. 그가 맞이한 새로운 무대는 소말리아 해적이 한국 선박을 억류했던 몇몇 사건을 암시한다. 영화는 미래로 상정하지만 우리는 이미 전말을 안다. 실패의 윤리가 제대로 기능했는지도 이미 역사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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