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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정이’, 너무 오래된 퍼즐

일단 영화는 도입부부터 실수를 저지른다. 설정 자막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설정 자막이나 내레이션 자체가 절대악인 건 아니다. 하지만 여기엔 최소한의 문장으로 의미 있는 정보를 전달하면서 관객을 새롭고 낯선 곳에 던질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오리지널 <스타워즈> 3부작의 도입부 자막은 얼마나 효과적인가. 하지만 그 설정이 지루하고 진부하다면 시청자들은 시작하자마자 탈출을 생각하게 된다.

설정에 확신이 서는 순간 결말까지 내용이 다 보인다

설정이라는 건 이렇다. 해수면 상승 기타 등등으로 지구는 끔찍한 곳이 됐다. 인류는 달과 지구 사이에 스페이스 콜로니들을 만들었고 그중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전쟁이 난다. 이제 반쯤 지옥 같은 곳이 된 지구는 콜로니에 자원을 공급하는….

하나도 안 맞는다. 지구온난화, 해수면 상승 기타 등등 온갖 재난을 다 합쳐도 지구인에게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지구다. 스페이스 콜로니 사람들이 부럽다고? 지구에 똑같은 시설을 만들면 된다. 훨씬 싸게 먹히고 인공중력을 만들 필요도 없고 유지비도 적게 나온다. 궤도에 지구에서 온 사람들을 위한 낙원을 건설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그 기술은 지구 환경의 개선에 이미 쓰였다. 요새 화성에 집착하는 일론 머스크 때문인지 ‘엘리트들이 환경 오염된 지구를 버리고 우주의 낙원으로 간다 어쩌고저쩌고’ 이야기가 쓸데없이 반복되는데, 심지어 머스크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엔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 설정이 영화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모든 건 정이라는 전투로봇이 왜 등장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 더 그럴싸한 것으로 교체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는 안 했다.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짐을 지고 시작하는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연상호는 자기가 만든 세계를 종종 과대평가한다. <부산행>은 열차 안에서 좀비가 날뛴다는 구체적인 설정이 좋았고 <방법>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건 초능력 소녀와 기자의 관계 묘사였다. 둘 다 배경이 되는 세계 자체는 평범하거나 무난했는데, 연상호는 각자의 장점에 집중하는 대신 무의미한 스핀오프를 만들어 세계관을 넓히는 일에 시간과 자원을 낭비했다.)

정이는 윤정이라는 유명한 전쟁영웅의 정신을 복사한 로봇 시리즈다. 이 시리즈를 제작한 악덕 회사에서는 이상한 실험을 하고 있는데, 부상을 당해 식물인간이 된 정이의 마지막 임무를 재현하며 성공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계속 막히는 게임 스테이지 안에 갇혀 있는 것인데, 이게 정말로 무의미하다. 생각해보라. 게이머들은 같은 스테이지를 반복하는 동안 경험이 누적되고 그게 이후의 게임에 반영이 된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정이 로봇이 실패하면 정확히 같은 기억을 가진 새 로봇으로 교체한다. 같은 결과가 나올 게 뻔한 실험을 반복하는 것이다. 나중에 뒤늦게 생각이 난 듯 몇 가지 변수를 추가하고 이게 실험 결과에 유의미한 차이를 만들어내는데 그래도 실험 자체가 쓸모없는 건 마찬가지다. 이들이 반복하는 건 몇십년 전 사건으로, 그러니까 베트남전이나 이라크전 당시 엔지니어가 제1차 세계대전 시절 무기를 그 당시 환경에서 실험하는 것과 같다. 도대체 이런 걸 왜 하는가?

이 무의미한 실험은 의도와 상관없이 일종의 상징처럼 보이기도 한다. 계속 지적되고 있는데도 반복되는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매우 수상쩍은 넷플릭스 한국 SF물들의 상징.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나와서 피드백이 반영될 수 없었다는 설정도 그럴싸하게 반영되어 있다.오로지 하드 SF만을 만들어야 하고 그게 유일한 답이라는 말이 아니다. 애당초 하드 SF라는 개념에 집착하는 것부터가 쓸모없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 지식을 최대한 반영하는 것은 의미 있는 전략이다. 모두가 공유하는 지식이라 불필요한 설명 없이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승리호>가 그리는 세계, 그러니까 이미 인공중력이 가능한 과학기술을 가졌는데도 아직도 궤도 엘리베이터를 운영하는 세계도 충분히 존재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영화는 (1) 추가 설명을 하거나 (2) 이상한 상태로 방치해야 한다. <승리호>는 (2)를 택했고 그 때문에 이 영화의 우주액션은 정말로 어색하고 종종 오리무중이다. 더 심한 건 <고요의 바다>로, 주인공들이 아무리 심각한 고뇌를 해도 도대체 말이 안되는 설정의 연속이 그 의미를 날려버린다.

<정이>는 <고요의 바다>만큼 심각하게 괴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평범하다. 거의 모든 것이 CG로 만들어진 배경은 게임이나 할리우드 중저예산 영화에서 수십번은 본 것 같다. 액션은 날씬하지만 요새 마블 영화의 액션을 공허하게 만드는 융통성 있는 물리학의 지배를 받는다. 일단 설정에 확신이 서는 순간 결말까지 내용이 다 보인다.

캐스팅은 특별했지만

<정이>라는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있는가? 있다. 캐스팅이다. <정이>는 김현주가 전투로봇으로 나오는 영화이고, 심지어 강수연이 김현주 캐릭터의 딸이다. 캐스팅 뉴스를 접하기 전에 이런 게 가능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는 것에 내 주머니 속 500원을 걸 수 있다. 적어도 한국 관객에게 전투로봇 김현주는 <아바타>의 외계 동물만큼 신기하고 낯설다. 발전 가능성이 보인다. 낯설고 도전적인 캐스팅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고 모녀 관계를 통해 정체성 문제와 AI와 관련된 주제에 대해 고민하며 드라마를 풀어가는 것이다.

문제는 이게 쉬운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AI는 최근 핫한 주제로 장르 안과 현실 세계에서 끊임없이 연구되고 토론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고전의 고민에서 멈춘다면 뒷걸음질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이>는 <블레이드 러너> 그리고 심지어 <철완 아톰>으로부터도 더 나아간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정체성의 문제에 대한 고찰은 설정과 함께 멎어버리고 윤리학의 문제는 1차원적 악당 캐릭터와 엮이면서 단순화된다. 지금도 사랑받는 장르 고전은 그 특정한 시기에 그 작품만이 가능했던 특별한 성취를 이루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같은 주제를 다루는 현대의 작품은 고전의 어깨 위에서 새로운 관점과 주제로 시작해야 의미를 가진다. 그게 고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다.

<정이>가 건드리지 않은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해보자. 인간의 기억과 사고가 복제된 상태의 인공지능의 사고방식이 원본인 실제 인간과 정확하게 같을까? 다르다면 그 다름은 두 주인공의 관계에서 어떤 변수가 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엄마를 떠나 보낸 50대 여성이 엄마의 복제품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감정이 과연 연민으로 끝날까? 더 깊고 복잡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아무 쓸모없는 설정과 악취미적인 농담들만 지워내도 계속 쏟아지는 이 가능성을 탐구할 시간이 주어진다. 문제는 이 설정과 농담들이 남아도는 시간을 채우는 필러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정이>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고민이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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