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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사랑의 이해’가 실패와 망설임을 마주 보는 방식
송경원 2023-02-15

이노우에 다케히코 감독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마치 음악의 한 구절처럼 1990년대의 추억과 낭만을 소환한다. 얼핏 과거의 영광을 되새김질하는 복고의 시선처럼 보이지만 실은 ‘영광의 순간은 지금’이라는 당위에 대한 이야기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세태나 환경,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이 언제나 당연할 가치를 말한다. 때문에 지금 시대의 결핍을 자극하고 한층 빛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그것이 스크린의 두터운 벽을 부수고 현실로 스며 나오지 못할지라도 짧은 위안은 충분한 위력을 가진다. 그러다 요즘 한창 재밌게 보고 있는 드라마 <사랑의 이해>가 문득 겹쳐 보였다. 오해의 오해를 거듭하는 답답한 전개와 망설임을 의인화한 것 같은 인물들의 행보에 ‘구닥다리 같다’는 반응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동시에 한국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계급 갈등을 첨예하게 드러낸 시대 반영적인 작품이란 견해도 나온다. 상이한 두 갈래 반응의 간격이 자못 흥미롭다.

<사랑의 이해>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정반대의 위치를 점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시간의 흐름에서 격리된 가치들을 소환해 변치 않는 위로를 전한다면 <사랑의 이해>는 현재가 적극적으로 반영된 세밀한 묘사를 바탕으로 하되 보편적인 감성에 젖어들도록 애를 쓴다. 달리 말해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즐기는 데 추억은 필수조건이 아니지만 <사랑의 이해>를 충분히 납득하기 위해선 현 시대의 초상을 대입하는 작업이 필연적이다. 아마 <사랑의 이해>를 흥미롭게 독해하는 방식 역시 경제 계급 문제를 어떤 식으로 재현하는지에 대한 세밀한 관찰일 것이다.

감정의 계급, 그 세세한 결을 나누다

“미경은 좋은 여자였다. 좋은 연애 상대였고 아마 좋은 결혼 상대일 터였다. 좋다고 다 갖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갖고 싶지 않다고 해서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좋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이혁진 작가의 소설 <사랑의 이해>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사랑의 필요충분조건에 대한 시의 적절한 성찰과 솔직한 고백이 담겨 있다. 조건과 감정의 이해관계를 담담하게 관통하는 이 서늘한 문장은 감정과 행동, 원인과 결과를 일대일로 매칭하는 이야기의 관습을 깨부순다. 사랑한다와 사랑하지 않는다 사이에 놓인 무수한 감정의 스펙트럼과 조건의 함량을 새삼 인지한다고 해야 할까. 이 문장의 복잡다단한 면모를 빌려 표현하자면 드라마 <사랑의 이해>에 대한 감상도 비슷하다. 좋은 이야기이고 좋은 소설이지만 좋다고 다 이해가 가는 건 아니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공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드라마 <사랑의 이해>의 뼈대는 인류가 오랫동안 반복해온 사각 관계 그대로다. 상수(유연석)와 수영(문가영)은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각자의 처지와 현실의 벽에 막혀 어긋난다. 그 잠깐 사이 상수에게 호감을 가진 미경(금새록)과 수영에게 마음을 둔 종현(정가람)이 등장하여 각각 커플로 맺어진다. 동서고금 내가 더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해주는 이에게 의탁한 관계의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다. <사랑의 이해> 역시 정해진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상수와 수영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갈등하며 주변 모두를 번민과 연민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다. 여기서 탁월한 점은 드라마가 감정을 핑계 삼아 누군가를 쉽게 악이나 적으로 설정하지 않는 태도다. 각자의 상황에 맞는 각자의 사정이 있고 네 남녀는 지극히 상식적인 대응을 한다. 악의에 눈이 뒤집히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내린 차선의 선택은 점점 좋지 않은 결론으로 흘러간다. 인물이 납득될 때 답답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향하는 건 사람이 아닌 상황이다. <사랑의 이해>는 보이지 않는 계급에 따른 형편을 직시하는 드라마다.

무릇 멜로드라마의 정수는 두 사람이 끝내 맺어진다는 결과가 아니라 둘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의 형태에 있다. 사실 상수와 수영이 맺어지든 아니든 크게 상관없다. 현실적인 제약과 숱한 조건의 벽에도 불구하고 이뤄진다면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의 소중함이 부각될 것이다. 현실에서는 대체로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극에서라도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반대로 끝내 이들의 연결이 좌절된다면 이들의 비극으로 말미암아 현실의 벽은 한층 강조될 것이다. 결국 무엇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른 선택의 문제인데, <사랑의 이해>가 흥미로운 건 그 선택 자체가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는 거다. 좋은 의미로 어떤 선택을 해도 납득이 될 만큼 캐릭터 구축이 잘됐고, 나쁘게 본다면 이들의 사각 관계는 드라마적으로는 이미 진부하다. 애정 전선이 크게 흥미롭지 않은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각자의 조건에 대한 인물들의 태도다.

상수와 수영, 나아가 미경과 종현까지 이들의 관계를 방해하는 건 경제적 격차에 의한 보이지 않는 계급이다. 청원경찰 아르바이트를 하며 경찰 시험을 준비하는 종현, 계약직으로 들어와 예금창구에서 일하는 수영, 명문대를 나와 종합상담팀 계장으로 근무 중인 상수, 금수저에 개인금융 브이아이피 담당인 미경은 각기 다른 계단 위에 서 있다. 1화 오프닝에선 커피로 하루를 시작하는 네 사람의 각기 다른 모습으로 형편을 제시한다. 믹스커피를 마시는 종현, 원두를 갈아 핸드드립하는 수영, 캡슐커피를 마시는 상수, 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용하는 미경을 차례로 보여주면서 경제 계급의 단계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재미있는 묘사지만 핵심은 형편이 다르다는 게 아니라 그다음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렸다. <사랑의 이해> 역시 환경에 좌절하는 클리셰의 중력을 완전히 극복하진 못하지만 가능한 상식적인 선에서 발버둥을 가감 없이 비춘다. 청원경찰을 하면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는 종현을 보면 가난하다고 해서 마음까지 가난하리란 법은 없고, 금수저라는 이유로 자신의 노력까지 폄하당하는 미경의 모습은 역차별도 존재한다는 당연한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복고와 복기, 세상 모든 망설임을 용서하며

진실은 잔혹하다. 사랑에는 실패가 엇갈림이 기본값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사랑하는 일은 드물고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해도 다른 여건 때문에 타이밍이 어긋나는 경우가 다반사다. 멜로드라마나 로맨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이 행동을 지배할 수 있는 무균실에서 배양된다. 하지만 감정의 함량은 순간마다 변화무쌍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한 차례 감정이 지나간 뒤 이유가 무엇인지 복기해보는 것 정도다. 설사 그게 진짜 이유가 아니라 할지라도, 환상과 거짓에 불과할지라도 이유가 있어야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다. 상투적인 전개와 느린 호흡, 복고풍 멜로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사랑의 이해>가 남다른 점은 여기에 있다. 감정의 파고를 따라갈 때 이 드라마는 하나도 흥미롭지 않다. 하지만 <사랑의 이해>를 통해 드러나는 진실은 누가 누구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는지에 대한 애정사가 아니다. 경제 계급이 우리를 어떻게 구분하는지를 좀더 세분화한 냉혹한 민낯이다.

욕망, 호감, 애정 등 관계에 뒤따르는 감정은 다양하고 두텁다. 하지만 대부분의 로맨스물은 이를 사랑이라는 커다란 카테고리로 단순화해버린다. 사랑의 온도와 결을 세세하게 나눌수록 공감의 여지도 넓어진다. 그런 관점에서 <사랑의 이해>가 결을 나누는 건 감정이라기보다는 감정의 토대가 되는 환경, 즉 경제적 계급이다. 사실 어떤 커피를 어떻게 마시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믹스커피도 때론 에스프레소보다 입맛에 맞을 수 있다. 돈이 무서운 건 기회를 앗아간다는 거다. 종현에게 단 한번의 낙방은 사랑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야 할 만큼 절박한 문제다. 가난은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다. 네명의 남녀가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은 이들의 개별적인 성격이라기보다는 경제 계급에 의해 처한 상황의 결과물처럼 보인다. <사랑의 이해>는 그 리액션의 과정을 세세하게 복기하는 드라마다.

실패가 곧 탈락인 종현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수영 주변을 맴돌면서 잘해주는 것 정도다. 감히 먼저 마음을 꺼낸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좀더 나은 상황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수영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주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버겁다. 한줌의 자존심을 마지막 보루로 세운 그는 애정보단 연민이 더 친숙하고 편하다. 변하지 않는 상수(常數)처럼 안정감 있다는 상수는 형편보단 마음을 선택할 정도의 여유가 있다. 다만 약간의 고민과 망설임은 필요하다. 경제적으로 모자란 것 없는 미경은 당당하게 직진한다. 마음에 들면 솔직하게 털어놓고 끝내 애정을 거머쥔다. 달리 표현하자면 경제 격차는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정도다. 이건 옳고 그름,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차라리 학습의 결과다. 돈은 시간과 기회를 제공하고 이는 실패에 대한 회복탄력성을 키운다. 미경이 저렇게 화사하고 구김살 없이 매력적인 건 우리가 바라는 당당하고 이상적인 ‘일반인’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실패에 대한 기회비용을 지불하기 어려운 이들은 마음을 드러내는 데 주저할 수밖에 없다. 초라해서 초라해지는 게 아니다. 만화 속 주인공처럼 상황을 멋지게 극복하지 못하는 ‘평범한’ 내가 부끄러워질 때 사랑과 감정은 사치가 된다.

돌이켜보면 <사랑의 이해>와 <더 퍼스트 슬램덩크> 모두 묘사되는 시간대가 모호하다. 전체적인 톤은 아름다웠던 시절을 되돌아보는 복고의 파도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두 작품 모두 특정 과거를 환기하기보다는 지금을 말하는 게 기본 태도다. 다만 그 결과는 사뭇 다른데,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꿈과 낭만, 꺾이지 않는 마음처럼 시간을 초월한 등대와 같은 가치를 환기시킨다. 과거보다 지금 더 결핍되었기 때문에 더 빛나는 가치들. 그리하여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 복고의 영향력 아래 과거와 현재의 대화의 장을 잇는다. 반면 <사랑의 이해>는 분위기와 무드는 복고풍 멜로드라마 같지만 철저하게 대한민국의 현재를 복기(復棋)한다. 착하고 평범할수록 각자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그 냉혹한 게임판 위에서 사랑의 감정이라고 예외가 될 순 없다. 철저히 현실반영적인 이해타산의 궤적. 그래서 더 애틋하고 마음이 쓰이고 공감이 간다. 누구나 한번쯤 계산기를 두드리고 감정을 속으로 삼켰을 것이므로. <사랑의 이해>는 조건 앞에 망설이고 현실 앞에 비겁했던 모든 이들에게 괜찮다고, 네 탓이 아니라고 무죄를 선고한다. 문득 얼마 전 한국 시청자들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화제의 드라마 속 인기 대사가 겹쳐 들린다. 우리는 왜 그 대사에, 재벌집 회장님의 돈을 향한 광적인 집착을 아꼈던 걸까. 오늘날 한국 사회의 애정과 관용은 어디에 고여 있는가. “사랑, 그게 돈이 됩니까? 사는 데는 도움이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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