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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어떤 영웅’,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

규범에 어긋나는 일이나 사람을 비난할 때 우리는 정의로워지는 기분이 든다. 그것이 집단의 이름으로 행해질 때 확신은 강해지고 수정 불가한 당위가 된다. 내가 굳게 믿어온 신념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나더라도 때는 늦는다. 이성과 합리가 끼어들 자리에 이미 비대한 확신이 들어앉은 다음이기 때문이다. <어떤 영웅>은 얼핏 아시가르 파르하디 감독이 꾸준히 이어온 테마를 계승하는 정도의 작품으로 보이지만, 그보다 한결 인류학적이다. 의심하지 않는 확신이 누군가의 명예를 한순간에 추락시키는 일이 SNS 시대에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세 유럽으로 가보자.

지난해 가을 취재차 방문한 독일 남부의 로텐부르크. 13세기 초 신성로마제국이 ‘자유제국도시’로 지정한 황제 직할 도시 중 하나였다. 이후 800년에 이르는 세월 속에 숱한 전쟁을 거치면서도 로텐부르크는 성내 건물들을 고스란히 지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측 미군 지휘관이 이곳의 역사적 가치를 알아보고 공습을 중단토록 한 뒤 성 안에 있던 독일 부대의 항복을 받아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렇게 중세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로텐부르크는 해마다 9월이면 당대 풍습을 되살리는 축제를 연다. 리들리 스콧의 몇몇 작품에 나올 법한 서민들의 술판과 춤판이 눈앞에 펼쳐지고, 갑옷과 창으로 무장한 이들이 군가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한다. 고증된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축제 참가자들은 모두 이곳에서 대대손손 집을 고쳐가며 살아온 주민들이다.

법적 처벌과 사회적 처벌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한낮 광장에서 펼쳐지는 공개 재판이다. 기대에 찬 군중이 왁자지껄 모여들고 피고가 재판대에 선다. 검사측에서 외친다. “로텐부르크의 자유 시민들이여! 이자는 빵 무게를 속여 판 혐의로 이 자리에 섰다. 지금부터 그 죄를 물을지어다!” 당시 유죄 평결은 증인 2명의 말만 일치하면 가능했다. 증인대에 선 주민 둘이 “다른 빵집보다 크기는 작은데 가격은 두배였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빵집을 향한 ‘별점 테러’가 가해지면 지체 없이 선고가 내려진다. “이자는 벌을 받아 마땅하다. 즉시 형을 집행하라!” 당시 법은 속임수를 쓴 상인이 구정물에 몸을 담그는 형을 받도록 돼 있었다. “나는 빵을 속여 팔지 않았어요. 안돼!” 사내는 있는 힘을 다해 외쳐보지만 의자에 묶인 채 우물에 빠진다. 군중의 반응은 스포츠 경기 관중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담가! 온몸을 다 담가야지!” 형벌은 가벼워 보이지만 제빵사는 온 동네에 소문이 퍼질 뿐 아니라 악취 나는 구정물을 씻어낼 물도 구하지 못해 다시는 장사를 할 수 없게 된다. 이처럼 효과 빠른 낙인법은 당시 감옥 없이도 많은 이들을 가둘 수 있었다.

거짓말과 참말이 본인도 모르게 뒤섞이며 감옥보다 더 큰 감옥에 갇히는 이야기 <어떤 영웅>을 본 독자라면 영화의 장면들이 떠오를 것이다. 중세부터 근대 초반까지 문자 그대로의 ‘마녀사냥’뿐 아니라 넓은 의미의 그것이 행해진 방식은 실로 다양했다. 당시 가장 흔한 처벌 중 하나는 ‘수치의 가면’(shame mask)을 쓰고 거리에 서 있도록 한 것이었다. 거짓말을 한 사람은 혀가 턱 아래로 길게 내려온 모양의 쇠마스크를 쓴 채 저잣거리에 나가야 했다. 마스크의 정수리쪽에는 조그만 종이 달려 있는데 조금만 움직여도 시끄러운 소리를 내기 때문에 지나가는 모든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이렇게 한 사람의 명예를 공개적으로 짓밟는 행위는 인류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원초적 처벌 수단이었다. 명예를 숭상하는 사회여서라기보다, 누군가를 따돌림으로써 공동체 안에서 소속감을 확인하는 사회적 동물의 어두운 본성이 작용하는 가운데 이를 활용해 권력을 지키려는 자가 자기 편의 결속을 도모하기에 용이했기 때문이다.

‘마녀’는 근대가 만들었다

로텐부르크 한편에는 ‘고문박물관’으로 알려진 중세범죄박물관이 있다. 끔찍한 고문 도구 수백점이 전시돼 있다. 사람의 두팔을 등 뒤로 묶어 뼈를 탈골시킨 다음 인대가 천천히 끊어지도록 하는 도르래, 아래쪽에서 불을 지펴 엉덩이와 주요 신체 부위를 달구는 의자, 그리고 <베네데타>(2021)에 등장하는 ‘고통의 배’에 이르기까지. 고문 끝에 자백을 하면 그대로 죄가 성립된다. 악마와 동침한 마녀로 지목되면 무자비한 고문을 통해 자백을 토해낸 다음 산 채로 화형대에 묶였다(이 고문을 견뎌내 무죄로 풀려난 이가 전체의 절반에 이르렀다고 한다). 취재 중 만난 마르쿠스 히르테 박물관장(역사법학 박사)은 이렇게 전한다.

“공개 재판과 처형식은 옥토버페스트처럼 축제와 다를 바 없었어요. 사람들이 누군가를 마녀로 고발하는 이유는 다양했는데, 근본적으로는 공포심이나 혐오가 작동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당시 사람들은 전염병이 돌거나 흉작으로 경제가 나빠지면 마녀 탓으로 돌리곤 했어요. 마녀사냥의 모든 과정과 양상을 보면 현대 인터넷상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묘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SNS에 누군가에 대한 증오 발언이 올라오면 여기에 수많은 사람이 갑자기 동조하는 상황이 벌어져요. 그리고 거세게 몰아붙이죠.”

최근 들어 더욱 학자들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마녀사냥이 횡행한 시기다. 중세 암흑기가 아니라 인쇄술의 발명으로 책이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16세기 후반 이후, 그러니까 근대에 접어들어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미디어가 출현한 시기에 마녀사냥은 정점에 이른다. 15세기에 시작된 마녀사냥은 무려 18세기 후반까지 이어졌고 유럽과 그 식민지를 통틀어 10만명이 기소돼 5만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산되는 가운데 이중 상당수의 처형이 17세기에 행해졌다. 그러니까 갈릴레이와 스피노자의 시대에 저 끔찍한 일들이 자행됐다는 말이다. 17세기 이탈리아 배경의 <베네데타>에서처럼 일부 교회의 추악한 권력욕이 그 출발점일 수 있지만,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군중의 동참이었다. 동참하지 않으면 자신이 당할 수 있었다. 히르테 관장이 덧붙인다.

“17세기 독일의 어떤 마을에선 한 사람이 마녀로 지목된 이후 6개월 만에 마을 사람 전체가 마녀사냥으로 희생당한 일도 있었어요. 서로가 서로를 마녀로 지목한 끝에 화형시킬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게 돼서야 마녀사냥이 끝난 겁니다. 매우 슬픈 역사죠.” 같은 맥락에서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저서 <마녀>를 통해 이렇게 강조한다. “마녀재판이 성공하려면 주민들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희생자들을 마녀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결국 이웃이었다.” <어떤 영웅>의 라힘(아미르 자디디)이 맞이한 일종의 사회적 죽음은 교도소도 의회도 아닌 이웃에 의한 것이었다.

감시와 추방과 처벌

중세와 근대를 구분하는 사회 양태 중에는 죄인을 성 밖으로 추방했는지 감옥 안에 가두었는지 여부도 있다. 성 밖으로 추방당한 중세의 죄수는 사회적 생명을 잃지만 더이상 감시 대상은 아니다(<베네데타>의 종반부). 굳이 푸코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근대 권력을 유지하려는 세력은 교육기관이나 교도소와 같은 효율적이고 일상적인 감시 체계를 구축해 사회 규모 확장에 대응했다. 소셜미디어 시대에 이르러 행해지는 사회적 처벌은 감시와 추방이 교묘하게 뒤섞인 모양새다. 디지털 판옵티콘의 감시 수단은 플랫폼 기업이라는 권력자가 만들지만, 이를 유지하는 것은 다수 이용자들의 자발적 가담이다. 감시는 이용자 스스로에 의해 이뤄지며 서로를 감시하다 만들어진 희생자는 커뮤니티의 성곽 밖으로 쫓겨나는 동시에 더 커다란 곳에 투옥된다. 라힘은 귀휴를 얻어 감옥에서 나오지만 미디어와 공동체의 의심이라는 거대한 감옥에 갇힌다. 그가 잘못된 일을 바로잡으려 노력할수록 명예는 바닥을 향한다. 이번 작품에서 파르하디 감독의 관심은 그래서 어느 전작보다 구조적이고 거대한 담론을 향해 있는 듯 보인다.

라힘이 교도소를 나서며 안과 밖을 대조하는 첫 장면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만큼이나 인상적이다. <어떤 영웅>의 전반에 흐르는, 개인의 힘으로는 거스를 수 없어 보이는 커다란 힘은 교도소와 같은 상부구조에서 나오지 않는다. 교도소 간부들은 제 입장을 먼저 고려할지언정 라힘에게 우호적인 편이다. 불가역적인 저 힘은 사회를 이루는 시민 한명, 자동차 한대가 모이고 모인 구성원들의 어떤 집합체다. 그래서 라힘이 교도소 밖으로 나온 직후 도시의 소음이 어지럽게 그를 휘감고, 이어 도착한 공사장에서는 거대한 벽이 그를 압도한다. 라힘을 가두는 더 큰 감옥의 오해들을 가리키는 듯한 갖은 소음은 의도적으로 소란스럽게 디자인돼 있다. 공공장소에서 새어나오는 마이크의 하울링음 같은 것들은 마치 봉준호 감독이 즐겨 찾는 ‘삑사리 사태’들처럼 빗나가고 엇나가는 라힘의 운명을 안타깝게 쳐다본다. 라힘은 충분히 선하지만 종종 상황에 떠밀려 거짓을 말하게 된다. 미디어를 통해 라힘에게 씌워지는 ‘수치의 가면’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이어서 그에겐 더 공포스럽다. 공포는 종종 일을 그르친다. 이것이 소수의 권력자에 의한 억압이었다면 분명한 투쟁 상대가 있으므로 문제는 단순할 것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투쟁의 대상을 찾지 못한 채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발명된 개인

관객 모두에게 깊이 기억될 이 영화의 엔딩은 감옥 안에서 밖을 바라본 시점이다. 화면 왼쪽 작은 프레임에는 교도관이 앉아 있고 오른쪽 문 바깥 프레임에는 출소한 남자와 마중나온 아내의 모습이 보인다. 나간 자와 갇힌 자, 그리고 감시하는 자가 한 화면에서 오간다. 근대성의 상징 중 하나인 감옥의 두터운 벽 안에서 무심한 타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떤 순환처럼 보인다. 교도소에 되돌아온 라힘과 그가 지금껏 겪은 바깥세상의 거대한 감옥을 향해 나가는 타인의 모습은, 저 타인들이 대단히 악하거나 모질지 않더라도 어떤 상황에 처하면 누군가를 마녀로 내모는 일원이 되거나 혹은 마녀로 몰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공동체의 일원들이 극렬한 팬덤이 되어 누군가의 좌표를 찍은 다음 상대를 비인간화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낭비하는 경향 또한 전세계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요즘이다. 평판과 관련한 인물들의 염려가 이 영화의 구성을 이끌어가는 점은 그래서 중요하다. 교도소 간부들은 매체 기사에 전전긍긍하고 자선단체는 명성을 지키기 바쁘다는 점에서 라힘의 처지와 다르지도 않다. 평판이 본질을 압도하는 곳에서 소셜미디어는 악성 댓글과 별점 테러의 장이 되곤 한다. 구정물에 빠지는 제빵사를 향한 “제대로 담가!”라는 군중의 외침은 현대에 이르러 단말기 이용자의 손끝에서 조용히 퍼져나간다. 언제 어디서든 한번에 비난할 수 있도록 해주는 테크놀로지는 손쉽게 정의로워지는 기분을 안긴다. <어떤 영웅>은 이런 풍경을 몇 안되는 주요 인물의 눈빛만으로 넉넉히 담아낸다.

교회를 포함한 근대 권력과 상부구조의 여러 조직들이 그야말로 근대적으로 맞물리며 유지·운영되었던 건 각자의 위치에 선 개개인의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를 위해 사람들은 선악 구분이 선명한 규범을 만들어낸 다음 이에 부합하면 영웅으로 칭송하고 그렇지 않으면 따돌리고 놀리고 때렸다. 근대적 개인은 그렇게 발명되고 양성됐으며 그 초기 과정에 희생된 이들이 마녀로 몰린 사람들이다. “유럽 문명은 악을 필요로 했고 악을 구현하는 존재로 마녀를 발명한 셈”(주경철, <마녀>)이었다. 이와 관련해 지금까지 대다수의 담론은 권력자와 상층부를 겨냥해 이들이 개인을 억압하고 착취한 측면만을 주로 바라봐왔다. 최근 사회학과 인류학, 진화심리학 등을 필두로 학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형성된 기류의 초점은 억압 사회를 구성하는 일원으로서의 개인이다. 이 글 제목이 패러디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의 저자 스티븐 핑커는 그래서 2021년 <지금 다시 계몽>을 내놨고, 조지프 히스가 2017년 <계몽주의 2.0>을 쓴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마녀사냥이 극에 달한 17세기에 계몽주의가 떠오르기 시작한 건 우연이 아니다. 근대적 기제로 가득한 기관차와 그 권력자의 착취를 노골적으로 상징하는 척하다가 급격한 반전을 통해 이와 같은 경향을 선보인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2013)는 그런 점에서 몹시 선구적이었다.

시선과 평판의 감옥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마녀사냥이 사라질 수 있었던 것은 근대 사법제도가 입증주의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악마와 성관계를 맺었다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을 입증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녀사냥은 스스로 소멸했다. <어떤 영웅>에서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라힘이 자신의 선행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는 설정이다. 죄는 검찰측에서 입증하면 되는 문제겠지만 금화 가방의 주인을 찾아 돌려준 라힘의 선행은 사소한 요소들이 꼬리를 물며 입증 불가한 일이 돼버린다. “세상에 잘못하지 않은 사람을 칭송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는 극 중 채권자의 대사처럼, ‘규범’에 의해 영웅으로 주목받지 않았다면 명예의 낙폭도 그만큼 적었을 터다. 사태가 꼬이면서 위선자가 돼버린 영웅은 오직 추락한 명예를 되찾기만을 원하게 된다. 라힘의 아들은 가벼운 발달장애를 갖고 있는데, 이를 활용해 대중의 동정표를 얻어내자는 주변의 제안에 라힘은 핏대를 세운다. 영웅으로 치켜세워지며 엉겁결에 방송 카메라 앞에서 거짓 재연을 하는 등 시선의 감옥에 갇혀본 라힘은 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평판 우선 사회의 씁쓸한 풍경이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을 증명해야만 삶이 어려워지지 않는 사회라면 그곳은 18세기의 어떤 속성으로부터 덜 빠져나온 세상일 것이다. 이 영화의 현대는 시민들이 서로가 서로를 간수와 죄수로 만들 수 있고 어떤 간수가 다른 곳에 가면 또 다른 죄수가 될 수 있는 일상적인 감옥 시스템이기도 하다. 라힘이 채권자와 다투다 문명과 먼 방식의 폭력을 사용할 때 문명의 도구(CCTV나 휴대폰 카메라)가 작동해 그를 위험에 빠뜨리는 장면은, 시선과 평판의 감옥에 갇힌 오늘날의 풍경이다. 그것이 죄다 소셜미디어 탓이라고 하면 곤란하다.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은 우리 본성을 끄집어내는 데 최적화한 테크놀로지일 뿐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소셜미디어의 풍경이 시각적으로 전면에 나서지 않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본성은 늘 우리 안에 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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