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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스즈메의 문단속’과 ‘이니셰린의 밴시’, 긍정의 함정과 비관의 힘
송경원 2023-04-05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며 어딘지 계속 브레이크가 걸린 이유는 아마도 내가 배배 꼬인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스즈메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에너지로 가득한 친구다. 처음 본 남자에게 반해 이변이 일어나자마자 문제의 장소로 달려가고, 일상으로 복귀하라는 전문가의 조언을 가볍게 무시한 뒤 끝까지 소타를 책임지며 일본 열도를 종단한다.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금방 친해지며 종국엔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마을의 위기를 막아내는 스즈메는 의지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가히 초인적이다. 스즈메가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묻는다면 답은 두 가지로 짐작해볼 수 있다. 하나는 원래 타인의 곤란한 상황을 참지 못하는 착하고 이타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하나는 스즈메가 한명의 독립된 인격체라기보다는 그렇게 결정된 이야기 속 당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도호쿠 지방 이와테현에서 이미 한번 저승의 문턱을 넘어갔던 스즈메는 돌고 돌아 이야기를 끝맺기 위해 처음부터 운명지어졌다.

<스즈메의 문단속>

세계의 종막과 남자 친구 그리고…

운명적인 만남과 끊어낼 수 없는 인연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꾸준히 반복해온 코드다. 하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은 정해진 운명과 떠맡아야 하는 역할을 과하다 싶을 만큼 전면에 내세운다. 스즈메는 평범한 여고생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단 한순간도 평범하지 않다. 일본 열도를 종단하는 스즈메의 꺾이지 않는 마음과 바닥이 보이지 않는 긍정의 에너지는 거의 ‘미래소년 코난’급이다. 한마디로 스즈메의 반짝임은 비현실의 영역에서 유지된다. 나의 생리적 거부감 역시 여기서부터 비롯됐다. 고백하자면 나는 스즈메가 언덕길을 자전거로 내려갈 때 다시 올라올 일이 걱정되는 종류의 인간이다. 바닷가 마을의 그림 같은 상쾌함을 위해 헌사된 장면에서도 올라올 때의 고됨이 먼저 떠오른다. 비관주의자의 방어기제에 불과할 수도 있다. 신카이 마코토가 이 장면에서 그쳤다면 나의 배배 꼬인 심보로 납득하고 마무리지을 것이다. 그러나 신카이 마코토가 스즈메와 소타를 다루는 방식은 실로 비인간적이다. 두 캐릭터는 살아 움직이는 인물이라기보다 재난의 애도를 위해 봉납된 제물처럼 정해진 수순에 따라 행동한다.

공동체를 위한 스즈메의 헌신과 희생은 재난을 직접 겪은 이의 측은지심이라 이해할 여지도 있다. 물론 생명까지 내던지는 돌격 정신은 받아들이기 힘들고 마치 죽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여 섬뜩한 구석마저 있다. 그럼에도 스즈메의 행동 자체는, 말은 된다. 따지고 보면 <스즈메의 문단속>은 일본 열도를 미미즈라는 재난에서 구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와테현에서 멈춰버린 스즈메의 시계를 다시 돌리는 이야기에 가깝다. 사실 <스즈메의 문단속>의 뼈대는 스즈메가 봉인했던 자신의 과거를 뒤돌아보고 상처를 직시한 뒤 미래로 나아가는 이야기다. 여기서 ‘개인=나’를 구한다는 건 곧 세계를 구한다는 명제와 연결된다. 여기서 세계는 나다. 이제는 종막을 고한 이른바 ‘세카이계’(世界系)의 흔적을 이곳에서 마주한다.

<스즈메의 문단속>

스즈메가 잃어버린 것, 신카이 마코토가 채워넣은 것

2000년 전후로 일본 대중문화 속 주요 코드 중 하나인 ‘세카이계’는 거대 서사의 세계 대신 개인=나라는 소우주에 집중해왔다. 신카이 마코토야말로 세카이계의 한가운데에서 성장한 감독이며 동시에 세카이계의 종막을 고한 인물이기도 하다. 나의 세계는 어떻게 끝이 나는가. 신카이 마코토의 답은 언제나 명확했다. 너라는 세계와 이어져 우리라는 세계로 확장되는 낭만적 해법. 세계관에 대한 명확한 설정이나 말이 되는 배경이 지워진 대신 내면묘사와 자의식에 몰두해온 신카이 마코토는 점차 대중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사이 어느샌가 길을 잃어버린 것 같다. <스즈메의 문단속> 속 허술하거나 적당한 설정들은 인간 스즈메의 행동 패턴으로는 당최 이해되지 않지만 스즈메를 이야기 도구의 자리에 놓는 순간 대부분 설명된다. 예컨대 스즈메는 왜, 그리고 어떻게 오이타현 유노하라 온천에 박힌 요석을 뽑았나. 미미즈를 억누른다는 요석은 어디에 꽂아도 상관없이 힘을 발휘하는 것인가. 검은 털의 사다이진은 인간이 저지른 일을 인간의 손으로 수습해야 한다며 스즈메를 굳이 이면 세계에 데려간다. 요석을 뽑은 인간이 결자해지를 해야 한다는 설정이지만 애초에 스즈메가 왜 요석을 뽑을 수 있었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관점을 달리하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린다. 봉인된 미미즈가 날뛰는 건 스즈메 탓일까. <스즈메의 문단속>은 작품 내에서 명확한 설명을 거부한다. 애초에 스즈메의 모험은 인과가 뒤집힌 상태기 때문이다. 스즈메는 미미즈를 억누르고 일본을 구하기 위해서 이와테현의 뒷문으로 들어간 게 아니다. 오히려 그 장소에 스즈메를 데려가야 했기 때문에 스즈메는 요석을 뽑는 역할이 주어진 쪽에 가깝다. 이건 일본 열도의 문제가 아니라 그날의 트라우마를 해결하지 못한 스즈메의 문제다. 요컨대 이와테현의 뒷문 속 풍경은 차라리 스즈메의 내면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그렇게 <스즈메의 문단속>의 인과는 필요에 의해 역전되어 있다. 소타의 경우는 한층 더 심하다. 교원 임용고시를 코앞에 두고 있는 소타는 가업이라는 이유로 일본 전역의 뒷문을 닫고 다닌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개인의 행복, 심지어 생계마저 뒤로 미룬 채 토지시 일을 수행하는 소타는 그야말로 대의의 화신이다. 심지어 임무를 수행하며 자신의 생명을 바쳐야 하는 순간에도 거의 망설임을 드러내지 않고 상황을 받아들인다. 소타의 할아버지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숭고한 임무를 위해 기꺼이 개인의 욕망과 감정을 지웠다. 소타가 저주받아 요석이 되기 전부터 그는 이미 살아 있는 요석이나 다름없었다.

<스즈메의 문단속>이 쉽사리 납득되지 않는 건 캐릭터들의 행동에 피와 살이 돌지 않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일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본래 ‘나’의 내면에 집중하던 감독이다. 운명의 붉은 실 앞에서 세계의 운명이나 자잘한 설정 따윈 사소한 일이었다. 그런 신카이 마코토가 언젠가부터 일본 사회 전체의 트라우마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얼핏 <스즈메의 문단속> 역시 ‘나’라는 세계를 구해줄 ‘너’라는 운명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스즈메의 세계를 구하는 건 결국 사랑, 넓게는 타인과 연결되는 관계다. “죽는 건 두렵지 않아. 누군가 죽고 내가 살아남은 건 운이야. 당신 없이 혼자 살아가는 게 두려워.” 스즈메와 소타의 절박한 연결은 이에 대한 화답일 것이다. 하지만 사적이어서 기적적일 수 있는 이 신비한 연애담이 일본 열도 전체의 문제로 확장되는 순간 길은 모호하게 흐려진다. 공간에 얽힌 사람들의 기억과 바람을 달래주는 행위로서의 토지시 작업은 매력적인 아이디어였다. 그런데 <스즈메의 문단속>은 중간부터 모든 서사의 공백과 모순을 ‘운명으로 예정된 사랑’으로 환원해버린다. 사실 그건 문제가 아니다. 원래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은 그래왔다. 하지만 이번엔 세계의 운명과 너라는 인연 사이에서 어정쩡한 자세를 취한다. 그 결과 스즈메와 소타는 자기희생에 망설임이 없는, 숭고한 인물이 되어버렸다.

스즈메와 소타의 사랑은 절절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어딘지 비인간적이다. 기꺼이 자신을 내던지고 대의 앞에 사적 욕망을 누르는 두 사람의 모습은 차라리 이상화된 영웅, 아니 이야기로서 기능을 부여받은 기계에 가깝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클리셰라 해도 좋을, 이른바 ‘다다이마/오카에리’ (다녀올게/어서 와요) 서사가 공허한 숙제처럼 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스즈메의 어둠을, 소타의 고뇌를, 재난의 상흔을 똑바로 응시하는가. 폐허가 된 놀이공원은 어느새 쓸쓸함 대신 낭만으로 가득하고, 신카이 마토코가 끝내 머물고자 하는 자리엔 마쓰토야 유미의 <ル―ジュの佺言>(립스틱 전언)을 필두로 한 1980년대 지나간 영광의 기억이 들어찬다. 한없는 긍정을 바탕으로 한 자발적 희생, 그 끝에 마주한 낙관적인 치유와 회복의 세계에는 좀처럼 살아 있는 ‘나’가 보이지 않는다. 나를 응시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그린 세계는 그저 예쁘게 빛나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질 뿐이다.

<이니셰린의 밴시>

고독이라는 예정된 운명 앞의 네 가지 답변

그렇게 스즈메가 무분별하게 발산하는 낙관 에너지에 지쳐버린 마음을 <이니셰린의 밴시>의 차분한 어둠이 쓰다듬어주었다. 판타지적인 상상력을 동원한 <스즈메의 문단속>과 비교하면 <이니셰린의 밴시>는 아일랜드 역사의 단면을 은유적으로 녹여낸 매우 사실적인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니셰린의 밴시>는 더 비현실적이기에 공감이 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관점에 따라선 미미즈가 일본 열도를 뒤집는다는 ‘설정’보다 콜름(브렌던 글리슨)이 자신을 건드리지 말라고 손가락을 자르는 게 더 말이 안된다. 의미 있는 작업을 남기기 위해 절교를 선언한 음악가가 단지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손가락을 자른다는 건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스즈메의 문단속>과 마찬가지로 <이니셰린의 밴시>는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사실성과 논리를 희생한, 일종의 부조리극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이 기어이 이어지는 운명과 인연에 관한 이야기라면 <이니셰린의 밴시>는 정반대로 불가항력과도 같은 관계의 종말에서부터 걸음을 뗀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에반게리온>과 더 닮았다고 해도 좋겠다. 타인을 완벽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고 소통이란 환상에 불과하다는, 파국의 운명. 감독이 던지는 질문은 간단하다. 예정된 상실의 운명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가. 답은 없다. 이것은 인간의 인지를 벗어난 차원의 질문이다. 파우릭(콜린 패럴)과 콜름이 왜 갈라지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 역시 이미 결정된, 인지 바깥의 운명에 불과하다. <이니셰린의 밴시>가 집중하는 건 예정된 운명, 단절과 고립이라는 비극 앞에 던져진 인간들의 반응이다. 영화는 파우릭, 콜름, 도미닉(배리 키오건), 시오반(케리 콘던) 네 인물의 서로 다른 반응을 통해 깊이에 다다른다.

크게 두 그룹이 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게 (관계의) 다정함이라 믿는 사람들과 의미 있고 납득 가능한 결과를 남기는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파우릭은 관계의 다정함을 갈구하는 인물이다. 대체로 손해를 보고 주변에서 답답하고 모자라다는 말을 듣지만 괘념치 않는다.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친구가 있다면. 도미닉 역시 본질적으로는 파우릭처럼 다정함과 상냥함을 추구한다. 이들의 특징은 주변으로부터 무시당한다는 거다. 어쩌면 다정함이란 영악하게 세태를 따르지 않는 태도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파우릭보다 한층 순수한 도미닉은 심지어 아버지에게도 학대를 당한다. 반면 파우릭의 친구였던 콜름과 파우릭의 동생 시오반은 의미를 찾는 사람이다. 파우릭과 어울리며 현재에 만족하던 콜름은 어느 순간 문득 그와 결별하고 기록에 남을 음악을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파우릭과 한지붕 아래 사는 시오반은 영민한 죄로 파우릭의 뒤치다꺼리를 떠맡아왔다.

이들이 내놓은 답은 근본적인 고독이라는 질문에 대한 네 갈래의 선택지처럼 보인다. 첫 번째 답변은 세계의 확장 또는 탈출이다. 좁은 섬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던 시오반은 섬(혹은 오빠 파우릭)이라는 세계를 부수고 바깥세계로 떠난다. 두 번째 답변은 도피다. 의미를 찾기 위해 파우릭을 끊어냈던 콜름은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고 집도 불태워진다. 콜름이 손가락을 자른 건 얼핏 분노의 표출처럼 보이지만 논리적으로 그의 행동은 말이 되지 않는다. 콜름의 자해는 차라리 예정된 실패를 미리 선점하는 도피에 가깝다. 그는 음악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했지만 그런 업적 따윈 불가능하다는 걸 이미 예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파우릭을 핑계 삼아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고 변명 거리를 획득한다. 세 번째 답변은 죽음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변하지 않고 순수한 존재인 도미닉은 끝내 버티지 못하고 시체로 발견된다. 발을 잘못 디뎌서 강에 빠진 모양이라고 하지만 앞선 상황들과 마찬가지로 도미닉이 왜 죽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는 유일하게 변하지 않았고 죽음은 운명이 그에게 허락한 답변이다. 마지막 답변은 파우릭이 쥐고 있다. 솔직히 파우릭의 행동과 상태를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파국을 초래한 그의 선택이야말로 세계와 나, 관계의 비밀의 단초를 쥐고 있다.

<이니셰린의 밴시>

세계와 나, 비관론자의 역설

네 인물이 각자의 운명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에는 파우릭의 사소한 거짓말이 있다. 콜름의 새로운 친구인 음대생에게 질투를 느낀 파우릭은 그를 돌려보내기 위해 아버지가 빵배달차에 치였다는 거짓 전보를 전한다. 본래 운명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부터 균열을 일으키고 진실의 꼬리를 내보이는 법이다. 파우릭의 거짓말 뒤 네 인물은 각자의 입장을 드러낸다. 도미닉은 파우릭에게 “당신은 다정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똑같네”라며 질타한다. 파우릭의 거짓말은 비난받을 정도의 일인가. 반복하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의 마음을 훼손시키는 순간, 운명은 인간에게 되묻는다. 너라는 세계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냐고.

어쩌면 타인과의 소통 따윈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고독이 인간의 필연이라면 우리에게 허락된 건 각자의 방식으로 그에 저항하는 것 정도일 것이다. 다만 그 순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세계의 운명 따위가 아니다. 타인이라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인정 혹은 거리두기다. 나의 세계를 지키고 싶은 자가 해선 안될 유일한 일은 타인의 세계에 함부로 흙발을 들이미는 일이다. 그 원죄를 범한 순간 파국은 쳇바퀴처럼 찾아오고야 만다. 세계가 당신 생각만큼 당신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당신도 세계에 지나치게 신경 쓸 필요 없다. 내가 책임지고 통제할 수 있는 건 그저 ‘나’라는 세계 하나 정도에 불과하다. 세계가 나를 신경 써주지 않는다고 운명에 섭섭할 필요 없다. 당신이 곧 ‘세계’다. 영화 말미 파우릭은 말한다. “그냥 넘기지 못하는 일들도 있는 거니까.” <스즈메의 문단속>처럼 과거로 묻고 지워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때론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감사도 원망도 있는 그대로 곁에 두고 함께 버텨내는 시간도 필요하다. 내일을 말하는 달콤한 낙관 대신 오늘에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불가항력의 비관 앞에서 나의 세계는 더 단단하게 무르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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