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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슬픔의 삼각형’, 신랄한 무질서의 해학, 뒤집으면 보이는 것들
송경원 2023-05-19

2022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슬픔의 삼각형>은 문제적 영화다.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스스로 함정에 빠진 백인 남성의 초상을 통해 시스템의 부조리와 위선을 파헤쳐왔다. 이른바 부조리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슬픔의 삼각형>은 “이 우스꽝스러운 시대에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영화”라 평하기에 손색이 없다. 물론 영화제 수상이 반드시 걸작을 담보하는 건 아니다. 공개 당시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명백히 갈릴 게 사실이며, 우리가 <슬픔의 삼각형>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히려 논쟁적인 영화일수록 텍스트의 깊이도 풍성한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한계와 아쉬움을 짚어보는 건 작품을 제대로 보는 방식이 되어줄 것이다. 빼어난 점과 아쉬운 점을 두루 살펴본 뒤에야 찍을 수 있는, 영화를 완성시킬 마지막 평가의 한점은 당신의 몫이다.

웃음은 세개의 꼭짓점 사이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이다. 일단 행위의 발화자가 필요하고 그것을 받아줄 수용자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게 바로 관찰자, 정확히는 관객의 위치다. 누가, 어떤 자리에서 이를 보고 있느냐에 따라서 웃음은 풍자와 해학이 될 수도, 조롱과 불쾌함의 찌꺼기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웃음의 발화자는 이것이 어디에 가닿을지 상상하고 섬세하게 다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일단 불씨를 당기는 일까지는 가능하지만 그 이후의 결과는 통제 바깥에 있는, 화학반응과도 같기 때문이다. 코미디는 그만큼 예민하고 섬세하여 위험한 작업이다. 문화권마다 수용 방식과 코드가 미묘하게 달라 이쪽에서는 세련되게 웃음을 던지는 것이 다른 쪽에서는 모욕적이고 불편할 수도 있다. 동시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보편성을 바탕에 두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보편성으로 특수성을 덮어버릴 때 우리는 종종 관찰자의 존재를 망각하곤 한다.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슬픔의 삼각형>은 자본주의와 계급의 모순, 시스템과 그 아래 깔린 인간의 본성을 풍자한 순도 높은 블랙코미디다. 루벤 외스틀룬드는 부조리에 관한 테마를 꾸준히 탐구해온 창작자 중 한 사람인데, 이번 영화까지 묶어 ‘남성 부조리 3부작’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 첫 번째 영화인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2015)이 인간의 본성의 밑바닥에 포커스를 맞췄다면 <더 스퀘어>(2018)에서는 시스템과 사회에 좀더 방점을 찍었다. 부조리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슬픔의 삼각형>은 굳이 말하자면 그 사이의 화학‘반응’을 기대하는 영화다. 요컨대 일정 부분 통제를 포기한다.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은 그만큼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기 쉬웠고, <더 스퀘어>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스웨덴(나아가 유럽) 사회의 모순과 위선을 들춰냈다. 그에 반해 <슬픔의 삼각형>은 정교한 장치와 노골적인 무대를 만들어놓고 그다음에 일어날 일을 기다린다. 이 순도 높은 화학 실험의 끝이 통렬한 반성과 성찰일지, 속내를 다 까발린 토사물에 대한 불쾌감일지는 어쩌면 당신이 서 있는 자리에 따라 갈릴 것이다.

풍자의 삼각형

잘나가는 인플루언서 모델 야야(샬비 딘)와 그의 연인인 남성 모델 칼(해리스 디킨슨)에게 일어나는 일을 따라가는 <슬픔의 삼각형>은 총 3부 구성을 취한다. 1부는 모델계를 중심으로 주인공 칼과 야야를 소개하는 동시에 사회 시스템의 부조리를 되짚는다. 2부에서는 부자들이 탑승하는 호화 크루즈를 무대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시스템의 모순과 허상을 폭로한다. 마지막 3부에서는 크루즈가 전복된 후 살아남은 8명이 무인도에 표류하는 이야기를 통해 시스템을 역전시키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결국 이 모든 상황을 관통하는 건 관계다. 루벤 외스틀룬드는 사람과 사람 혹은 사람과 시스템의 충돌을 통해 시스템의 모순을 드러낸다. 1부에서는 사랑 싸움의 형태를 취하기도 하고, 2부에서는 거대하고 과장된 부조리극의 무대를 만들며, 3부에서는 원시사회로 돌아간다. 하지만 핵심은 동일하다. 서로 섞이지 않는 것들이 서로 충돌하여 불꽃이 튀기는 순간, 부조리의 실험은 시작된다.

1부의 모델계는 마이크로 단위에서 역전된 계급사회다. 남자 모델들은 3분의 1도 안되는 수입을 받으며 수시로 부당한 상황에 노출되는데, 백인 남성 모델인 칼은 성적인 조롱까지 감내해야 하는 최약자다. 패션쇼장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칼은 패션계의 거물 여성들이 등장하자 도미노처럼 자리를 이동한 끝에 결국 뒤쪽 자리로 쫓겨난다. 그리고 화려하게 시작되는 패션쇼,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하는 주인공은 젊은 여성 모델 야야다. 압축된 이미지로 계급에 대한 노골적인 풍자를 시도하는 이러한 장면은 영화 내내 반복된다. 마치 우화를 그린 연극 무대처럼 특정 상황을 비틀어낸 무대와 이를 극단적으로 드러낸 이미지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이자 목적이다. 서사가 다소 난잡하고 느슨해질 때도 이러한 밀도 높은 이미지와 상황들은 확실히 각인된다.

칼과 야야는 데이트 비용 문제로 다투는데, 칼은 돈은 훨씬 많이 벌면서 데이트 비용은 공평하게 내자는 야야가 불만이다. 야야는 야야대로 자신에게 기생하는 듯한 칼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업계에선 강자지만 전체적으로 볼 땐 언제 은퇴할지 모를 불안함에 시달리는 야야는 누군가의 트로피 와이프가 되어 안전하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이에 칼은 자신이 성공할 테니 걱정 말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가 야야의 트로피 와이프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슬픔의 삼각형>을 관통하는 또 다른 주제는 마르크시즘이다. 철저한 자본주의 한 가운데에서 영화는 평등에 대한 화두를 꺼낸다. 사실 이 또한 모순의 장치로 각각 다른 관점에서 논해야 할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한 무대로 끌어들여 그 안의 사람들이 충돌하도록 꾸미는 것이다. 여기서 이 영화의 두 번째 행동 원리를 확인할 수 있다. <슬픔의 삼각형>은 좀처럼 한자리에 있을 수 없는, 있어선 안되는 것들을 무리해서라도 끌고와 물리적으로 뒤섞는다. 마치 바텐더의 셰이킹처럼. 그리하여 발생하는 구토와 같은 잔해들을 전시하며 이것이 본성이라고 강변한다. 개별 장치와 세팅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흥미로운데, 이 문화인류학적 실험이 늘 효과적인지는 다소 의문이다. 코미디라는 풍자의 무대를 경유하지만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이 간과한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코미디야말로 그 어떤 장르보다 예민하고 다루기 어려운 도구라는 점이다.

계급 피라미드를 역전시킨 트로이의 목마

이러한 난장판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 2부 호화 요트 편이다. 인플루언서로 요트에 초대된 야야와 칼은 다양한 인간 군상과 대면한다. 요트는 폐쇄된 사회의 축소판이자 충돌을 위한 모순덩어리 화약고나 다름없다. 칼과 야야는 일종의 관찰자로서 이들 사이를 누비며 계속 ‘웃픈’ 상황이 연출된다. 기본적으론 자신의 지위에 따라 일종의 상징이 된 각 인물이 서로 충돌하며 끊임없이 마찰음을 내는 구성이다. 그렇게 아내와 애인을 동시에 데리고 배에 탄 비료사업 CEO 드미트리(즐라트고 부리치)의 등장을 기점으로 계급의 피라미드는 조금씩 비틀어지기 시작한다. 특히 부자 아내의 바람에 따라 직원들이 수영복을 갈아입고 바다에 줄줄이 뛰어드는 장면은 <슬픔의 삼각형>이 계급 피라미드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순간이다. 심심해진 부유층 여성은 문득 종업원에게 역할 바꾸기 놀이를 제안한다. “우리는 다 동등한 존재”라는 말이 계급의 꼭대기를 점한 자의 입에서 나올 때 그 발언은 위선과 조롱으로 채색되고, 관찰자인 관객은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당신들도 우리처럼 즐겼으면 좋겠다는 말은 한창 노동을 하고 있는 상대에 대한 일말의 이해도 없는 폭력에 불과하다.

서서히 닥쳐오는 폭풍우와 함께 계급의 전복은 이미 예고되어 있다. 배가 흔들릴 때 직원들은 승객들에게 음식을 먹는 것이 낫다며 과식을 권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속성에 대한 은유다. 이윽고 파티가 절정에 다다른 순간 먹은 음식을 게워내면서 구토로 범벅되는 이들의 모습은 자본에 의한 계급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절정의 장면이다. 존엄을 잃고 욕망에 휘둘린 끝에 개돼지의 형상으로 바닥을 기는 인간들의 모습은 가장 화려한 파티 한가운데에서 불편하고 역겨운 이미지를 불쑥 들이민다. 이처럼 호화롭고 과잉된 이미지를 삽화처럼 나열하던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이 난장판에 이르는 길 사이사이에 자신의 메시지를 성실하게 덧칠한다. 칸영화제에서 영화를 공개한 직후에 가진 인터뷰에서 감독은 “이 영화는 마르크시즘을 영화 안에 잘 숨겨 미국에 그걸 전파할 계획으로 만든 ‘트로이의 목마’”라고 밝힌 바 있다. 농담과 진심 사이를 맹렬히 오가는 이 발언처럼 <슬픔의 삼각형>은 자본주의와 마르크시즘을 대립시키는 연극적인 상황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호화 요트에서 기능적으로 최상위 계급인 선장 토마스(우디 해럴슨)는 파인다이닝이 싫다며 햄버거를 먹는 사회주의자다. 만찬 자리 마지막에 러시아계 CEO와 선장이 벌이는 토론은 마르크스와 레닌, 레이건과 마크 트웨인, 마거릿 대처와 케네디의 명언들을 가로지르며 가장 의미심장한 동시에 의미 없는 격론을 벌인다.

폭풍이 지나간 후 선장은 미국의 노동운동가 유진 데브스의 명연설을 떠들어대고 마치 신호인 양 해적선이 습격하여 배가 침몰한다. 3부는 배가 전복된 뒤 섬에 표류한 8명의 생존자들과 함께 아이러니한 인류학 실험의 절정을 선보인다. 마치 원시로 돌아간 듯한 섬에서 생존자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계급을 벗고 또 다른 위계질서를 만든다. 섬에서 필요한 건 음식이고 생존자 중 유일하게 낚시를 해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사람은 청소부 아비게일(돌리 드 레온)이다. 자연스레 무리의 중심에 선 아비게일은 사람들에게 각자의 역할을 나눠준다. 가장 하위계급이었던 청소부가 계급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선 것이다. 이렇듯 <슬픔의 삼각형>은 과장된 상황을 통해 은폐된 계급성을 선명히 드러낸 후 그것을 역전시킨다. 자본주의와 마르크시즘의 우열을 논하려는 게 아니다. 차라리 계급에 종속된 인간의 본성을 해방하는 쪽에 가깝다. 그 꼴이 때론 섬뜩하고 때론 슬프다가도 대체로 역겹고 과장되며 우스꽝스럽다.

슬픔의 형태는 (아마도) 삼각형이다

영화의 제목인 ‘슬픔의 삼각형’은 적어도 세 가지 뜻을 내포한다. 1부에 오디션 캐스팅 디렉터들의 대사로 스치듯 언급되는 이 제목은 표면적으로는 뷰티업계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미간을 찌푸릴 때 나오는 눈 사이 주름을 뜻한다. 다음으로 계급 피라미드의 꼭짓점부터 하위계층으로 이어지는 삼각형을 반복해서 그린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칼과 야야, 그리고 필리핀 출신 청소부 아비게일의 관계를 상징한다. 칼과 야야는 연인 관계지만 경제적인 상하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2부에서 칼과 야야가 방에서 사랑을 나눌 때 청소부 아비게일이 문을 열고 들어와 이를 지켜보는 장면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이후 3부에서 권력을 쥐게 된 아비게일은 칼에게 성적인 서비스를 요구하고 뒤집힌 계급 피라미드하에서 셋의 관계는 꼭짓점이 날카로운 삼각구도를 그린다. 똑바로 볼 때는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뒤집으면 선명하게 보이는 마법.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여성과 남성, 부자와 빈자 등의 상황을 역전시켜 욕망의 단순한 민낯을 들이민다.

사실 탐색이랄 것도 없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노골적으로 토해낸다는 게 이 영화의 정체성이다.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계급에 대한 풍자를 일차원적인 상징으로 투영하여 관객의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려 애쓴다. 다만 그 결과가 반드시 성공적인지는 미지수다. 감독은 마치 인간 사회를 해부할 기세로 달려들어 여러 상징과 풍자의 요소를 섞어놓는데 이 과정에서 전작과 비교하자면 몇 가지 단점마저 증폭된다. 우선 이 영화가 제시한 상황의 상상력은 제법 낯이 익다. 계급성에 대한 화두는 가깝게는 <기생충>(2019)이 떠오르고 3부의 고립된 섬이라는 상황은 리나 베르트뮐러 감독의 <귀부인과 승무원>(1974)부터 드라마 <로스트>, 희곡 <훌륭한 크라이턴> 등 여러 장르에서 이미 익숙하게 봤던 전개다. 자본주의 풍자극이라는 면에선 마르코 페레리 감독의 <그랑 부프>(1973)의 그림자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위험을 상징하는 당나귀 울음 소리를 비롯해 전체적인 구성을 놓고 보면 <오즈의 마법사>가 연상되기도 한다. 3부 구성으로 리듬감을 키우려 했지만 서사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은 점도 아쉽다.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강렬한 상황을 세팅해 이미지의 밀도를 높인 방식이 가진 한계였을까.

무엇보다 우화와 필요에 의한 상징으로 점철되다 보니 정작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캐릭터는 계급성을 대표하는 상징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기에 내적인 고뇌와 감정의 흐름이 외려 비인간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욕망의 심연을 들여다보려는 영화가 살아 움직이는 욕망에 무관심한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부조리 3부작의 첫 번째인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과 대조되는 지점이다. 다시 환기하자면 웃음의 결을 최종 결정하는 건 관찰자의 위치다. <슬픔의 삼각형>은 스스로 밝히듯 백인 남성의 시점에서 아이러니를 증폭한다. 덕분에 허무주의와 계급 해체를 넘나드는 농담이 날카롭게 다듬어지지만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소외와 대상화가 이뤄진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 영화가 또 다른 (지적)계급의 삼각형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좋겠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그것 자체도 풍자와 자기반성의 일부일 수 있겠다. 크고 작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슬픔의 삼각형>이 폭로하는 시스템의 부조리와 욕망의 민낯은 놀라운 구석이 있다. 기쁨, 분노, 행복, 혐오, 공포, 체념, 허무 등 인간사를 수놓는 여러 감정의 무지개가 스크린에서 각자의 형태를 드러낸다. 그중 슬픔에 모양이 있다면 아마도 삼각형이리라. 서로 원하고 원망하며 팽팽하게 잡아당겨 대치하는 욕망의 삼각형. 안정과 불안, 어느 쪽에 가까운지에 따라 당신이 선 꼭짓점의 자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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