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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주인 없는 영화, ‘어파이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어파이어>의 후반부, 갑작스러운 통증으로 병원에 입원한 출판사 대표 헬무트(마티아스 브란트)의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온 나디아(파울라 베어)는 레온(토마스 슈베르트)에게 외친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안 보여?”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말하던 헬무트가 사실은 암 환자 병동에 입원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떠나가는 나디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레온은 두눈을 감싸고 탄식한다. 되짚어보면 영화의 첫 장면에서 운전 중인 펠릭스(랭스턴 위벨)가 자동차 고장을 감지하며 비슷한 말을 건넸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 그러나 창밖을 향해 눈을 감고 있던 레온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답한다. 그는 세계를 보고 듣지 않는다. 무엇을 보고 들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어파이어>를 휴가의 영화라고 말한다. 물론 이 영화는 여름휴가를 보내는 네 남녀의 우연적인 만남을 다루고 있으며, 그들 사이의 복잡한 감정과 날씨의 변화를 예민하게 비춘다. 휴가 영화를 구성하는 많은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어파이어>는 그러나 페촐트가 영화를 계획하면서 떠올렸다고 밝힌 몇몇 휴가 영화들(<일요일의 사람들>에서 에리크 로메르의 <수집가>에 이르기까지)처럼 눈앞에 존재하는 자연의 풍부한 생명력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작업과는 거리가 멀다. 세계의 매혹이 통제 바깥의 자유로움에 있다고 믿으며, 자연의 경이에 눈과 귀를 열어두는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대신 페촐트가 창안한 휴가의 풍경은 자동차가 멈추고, 벽지에 곰팡이가 피어나고, 평온한 별장 근처에서 꺼지지 않은 산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화면을 중단하고 재건을 요구하는 기록으로 채워져 있다.

휴가지의 바깥

무엇보다 영화의 주인공인 레온이 제대로 된 휴가를 보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는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대신 원고를 완성해야 하는 문제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혀 있으며, 바다에서 수영하거나 지붕을 고치고 요리를 만들어 먹는 주변 사람들의 일에도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페촐트가 <어파이어>를 구상하는 단계에서 참조했다고 밝힌 로메르의 영화나 미국의 스크루볼 코미디처럼 여유롭거나 리드미컬한 대화를 주고받을 만한 여력이 없다. 그는 신경이 예민하고 시도 때도 없이 잠든다. 바깥으로 나가자는 제안을 거절하고 어디서나 잠이 들기 때문에 그가 제대로 보지 못한 일들로 매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한다. 레온에게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앞뒤를 파악할 수 없는 돌발적인 사건으로 다가온다. 레온은 소설을 쓰기 위한 작은 공간에 앉아 있지만, 아무것도 실행하지 않는다. 그는 마치 휴가의 바깥에 있는 사람처럼 다뤄진다.

레온은 여름휴가의 주인이 아니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숲속에 진입해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다. 그 별장은 레온의 것이 아니다. 펠릭스 어머니의 소유인 그곳엔 이미 나디아가 도착해서 생활하고 있다. 게다가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관계 역시 레온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는 상대를 바꿔가며 섹스하는 이들의 옆방에 언제나 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뒤바뀌는 관계의 옆자리에서 다른 이들을 지켜볼 뿐이다. 심지어 레온이 쓰는 글조차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는 소설을 쓰는 작가지만 남들에게 능숙하게 이야기를 전달하지도, 자신이 쓰는 글을 똑바로 설명하지도 못한다. 숲속에 도착한 헬무트는 그가 쓴 소설 <클럽 샌드위치>의 출간을 반려한다. 그가 휴가지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어파이어>의 이야기는 크게 훼손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레온은 <어파이어>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는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가 아니라 화면의 기록에 노출된 수동적 존재다. 그의 눈과 귀 뒤편에 불투명한 세계가 존재한다. <어파이어>는 레온, 또는 카메라가 세계를 바라보는 기록이 아니라 그 세계가 레온을, 영화의 시선을 관찰하는 역투시도법의 무대다.

이곳에 도착한 레온이 거론하는 가장 우스꽝스러운, 그러나 그의 처지를 가감 없이 대변하는 말은 이런 것이다. 나디아가 수영하러 바다에 가자고 제안하자 레온은 거절하며 대답한다. “일이 허락하지 않아요.” 레온은 주어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하지 않는다. 주어는 일이다. 작가인 그에게 그것은 소설을 쓰는 작업이고, 원고를 마쳐야 하는 상황이다. 그는 육체적으로 숲속에 존재하지만, 다른 이들을 지켜보거나 잠드는 것 외에 달리 실행할 수 있는 행동을 허락받지 않았다. 정물이나 다름없는 레온에게 달라붙는 것은 날벌레거나, 뜨겁게 내리쬐는 7월의 태양뿐이다. 그는 자외선차단제와 벌레퇴치제를 피부에 뿌리며 부패하고 있다. 레온은 주어에서 탈락한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그는 단지 보고 듣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다. 레온은 자신이 이야기를 창작하는 작가이자 주어진 휴가의 시간을 관장하는 주체라고 믿지만, 영화적 인물이 수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박탈당한다. 글을 쓰지 못하고, 행동하지 못하고, 사랑을 고백하지도, 우정을 확인하지도 못한다. <어파이어>가 진정 휴가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는 이 영화가 여름휴가의 시간을 다루거나 바닷가와 숲속을 보여준다는 사실과 무관하게 영화적 주체의 자리를 비워둔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휴가를 뜻하는 단어 바캉스의 어원은 ‘텅 빈’, ‘비우다’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다). 레온의 시선과 움직임을 매개로 전개되는 이 영화는 어느 것도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이지 못한 무(無)의 자리에 있다. 로메르가 휴가 영화의 이상적인 형태를 말하며 언급한 대로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는 바캉스의 시간”을 통과하는 존재가 바로 레온이다. <어파이어>에서 그는 세계를 바라보지만, 세계의 일부로 속하지 않는 자의 비어 있는 초상으로 화면에 붙잡힌다.

뒤집힌 주체

<어파이어>는 닫힌 공간 안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한 남자를 묘사한다. 페촐트는 그의 시선과 움직임을 묘사하기 위해 바깥으로 뚫린 창문이 필요했을 것이다. 카메라는 레온의 얼굴이 있는 높이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비춘다. 한밤중에 잠에서 깬 레온이 커튼 사이로 배드민턴을 치는 세 사람을 지켜보는 장면에서 레온은 시선을 제외한 모든 것이 완벽하게 닫힌 자리에 멈춰 있고, 세계는 바깥에서 그가 이해할 수 없는 현상과 소리로 그를 자극한다. 얇은 벽을 부식하는 미세한 곰팡이에서부터 거대한 산불에 이르기까지 화면 바깥의 물질적 활동은 그렇게 그의 내부를 잠식한다.

흰 잿가루가 아름답게 흩날린다. 눈처럼 내리는 잿가루는 지면에 남은 모든 인물의 피부에 닿는다. 숲속에 남겨진 모든 사람이 잿가루를 맞는다, 존재하는 이들은 잿가루처럼 흩날리고 있다는 듯이. 잿가루 아래서 인간을 포함한 세계가 평등하게 부서지고 있다. 잿가루가 날리면서 헬무트는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지고, 펠릭스와 데비드(에노 트렙스)가 사고를 당한다. 잿가루에 의해 그들의 시간은 소멸로 향할 것이다. 물질은 반대편에 있다. 중심은 이곳이 아니다. 화면 바깥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타오르며 잿가루로 변해버린 물질처럼 지각되지 않는 미세한 삭감으로 화면은 희박하게 지워진다.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사건을 바라본 시선의 주체는 인물과 그들을 포착한 카메라가 아니라 산불이자 그것으로 인해 불타버린 물질의 잿가루다. 아름답지만 치명적인 그 잿가루가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동과 감정, 그로부터 발생하는 관계의 변화가 펼쳐지지만, 그것은 여전히 의미를 규정하기 어려운 불투명한 사건으로 남는다. 레온은 뒤늦게 나디아에게 처음 봤을 때부터 사랑을 느꼈다고 고백하지만, 그들이 처음 본 순간이 언제인지(레온은 그녀를 창문 사이로 지켜보지만, 그전에 침실 너머의 소리를 들었고 서로 첫인사를 나눈 것은 다음날이다), 그 감정이 정말 사랑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어파이어>가 레온의 시선과 청각을 빌려 세계를 전달하는 방식은 이 지점을 향해 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수동적으로 노출된 존재인 레온은 영화에 관한 관람자의 수동성, 더 나아가 세계에 관한 인간의 수동성을 환기한다. 그는 모든 사건과 인물을 바라보지만, 휴가지에서 보여주는 많은 행동이 그랬던 것처럼 반응할 수 없다. 그의 수동성은 꺼지지 않는 산불을 지켜보는 카메라의 시선처럼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벌어지고 있으며, 원인을 파악할 수 없이 이어지는 사건 앞에 영화의 자리를 지정한다.

아무도 남지 않은 해안가에서 레온은 바다의 조류들이 발산하는 발광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린다. 이 영화의 바다는 여름 햇빛과 파도의 인상으로 가득한 생명력 넘치는 자연의 공간이라기보다는, 페촐트가 인용하는 아녜스 바르다의 말대로 “물과 흙과 바람, 그리고 영화에 필요한 외로움을 제공하는 장소”로 다가온다. 언젠가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앞모습과 뒷모습을 촬영한 펠릭스의 사진을 보고 레온은 그들의 얼굴이 바다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퉁명스럽게 반문한 적 있다. 그는 얼굴만을 보여주는 제한된 프레임의 한계를 짚는다. 그 얼굴이 무엇을 바라보는지 바깥의 광경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깥을 확신할 수 없는 시선이라는 문제는 바닷가에 남겨진 그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레온은 나디아가 보고 싶다던 조류의 아름다움을 지켜보지만, 그 시선이 무엇을 바라보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바깥과 교통하지 않고 내부에 갇혀 있다.

페촐트는 <어파이어>가 제공하는 주요한 감정이 질투와 수치심이라고 말한다. 레온은 질투하고 수치심을 느끼는 인간이다. 다른 사람들과 더 친밀하게 지내는 펠릭스에게, 자기보다 더 능숙하게 이야기를 꾸미는 데비드에게, 문학도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자기 소설을 혹평한 나디아에게 깊은 질투와 수치심을 느낀다. 그 감정은 지각을 오염시킨다. 질투와 수치심에 사로잡힌 레온은 자기가 정확히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영화의 수동적 존재로 전락한 그는 오염된 감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다.

얼굴을 바라볼 때까지

레온으로 설정된 영화의 자리가 불투명하기에, 페촐트는 스크린에 펼쳐지는 현재 시점의 화면에 다른 매체의 시제를 덧붙인다. 영화는 현재형의 장면을 건네는 경험이다. 영화가 전달하는 시간은 장면이 바뀔 때마다 과거로 전환되지만, 순식간에 또 다른 현재를 불러들인다. 그런데 이 현재형의 경험은 레온이 보고 듣는 것에 실패한 대상, 화면에 감각되지 않는 것들이다. <어파이어>는 영화가 발산하는 현재를 받아들이는 대신 사진과 글쓰기라는 다른 시제를 빌려온다. 페촐트는 <어파이어>에서 영화를 불순한 시제의 경합으로 다룬다. 그의 말을 빌리면 “영화는 과거와 현재의 균형을 찾는 형식”이다. 현재형으로서의 영화, 그러나 촬영된 사진과 뒤늦게 녹음된 목소리가 영화에 입혀지면 현재는 과거에 노출되어버린다. 그렇게 영화는 여전히 숲속에 머무는 과거의 레온과 그 바깥에서 글을 쓰고 사진을 바라보는 현재의 레온을 분리한다.

<어파이어>는 레온의 소설을 읽는 헬무트의 목소리를 빌려, 지금껏 카메라가 지켜본 장면들이 레온에 의해 각색된 현실의 한 단면이거나 기억의 조각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투여한다. 사진과 글쓰기의 시제는 비극으로 닫혀버린 여름휴가의 시간을 돌아보는 시선을 드리운다. 펠릭스와 데비드가 막다른 길이 아닌 다른 경로로 갔다면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헬무트의 내레이션처럼, 영화가 상상하는 가능성의 세계를 투사하는 것이다. 페촐트는 모든 휴가 영화는 그리운 것, 혹은 실수한 것에 대한 기억을 재생한다고 말한다. “아마도 이 여자와 키스를 할 수 있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 순간을 놓쳤을지도 모른다. 30년 후 침대에 누워 있을 때, 그 순간이 인생의 실수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파이어>가 전하는 감정이다. 펫졸트는 스크린에 도착한 현재를 고정된 단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변형될 수 있는 가능세계로 본다. 이 영화는 실현되지 않은, 감지하지 못한, 다가오지 않은, 존재하지 못한 현실에 관한 기록이다.

레온이 계속해서 잠들고 깨어나던 것처럼, <어파이어>는 그가 적은 소설을 매개로 영화에 어스름한 꿈의 질감을 물들인다.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거대한 재난 앞에 선 영화를 재건하기 위해서라면, 영화의 특별한 역량으로 여겨지는 많은 것을 중단해야 한다고 믿는 듯한 영화를 만들었다. <어파이어>가 페촐트의 걸작은 아니지만, 가장 과감하게 영화의 요소들을 비워낸 작업인 것은 분명하다. 주체가 없고, 행위가 부재한 채로, 중심에서 밀려난 영화의 형태를 그리는 작업을 말이다.

결말에 도착한 레온은 어느 여자의 뒷모습을 포착한 사진 한장을 바라본다. 펠릭스는 사람들의 앞모습과 뒷모습을 모두 촬영했지만, 그 사진의 피사체만은 앞모습이 누락되어 있다. 돌아보지 않는 그 뒷모습은 나디아인가? 알 수 없다. 사실상 영화는 그 자리에서 끝난다. 나디아의 얼굴은 빈칸으로 남는다. 그리고 건물 바깥으로 나간 레온의 눈앞에 기적처럼 나디아가 되돌아온다. 누락된 나디아의 얼굴이 그의 시선 앞으로 다가온다. 이 순간에 카메라는 닫힌 프레임을 넘어서 상대방을 바라보는 레온의 시선을 믿을 수 있을까? 펠릭스의 사진을 두고 말한 것처럼 그 얼굴이 무엇을 보는지 확신할 수 없는데도 나디아가 그의 눈앞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는 눈앞에 존재하는 세계를 보고 듣는 장치다. 그런데 영화는 세계를 보고 듣는 일에 실패한 레온의 감각을, 혹은 그 감각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을까? 역시 알 수 없다.

<어파이어>는 마지막 시선의 교차를 통해 그 답변의 자리를 남겨둔다. 빌렘 플루서는 ‘글쓰기의 몸짓’을 서술하면서 단락을 끝내는 마지막 문장으로 그리스의 철학자 플루타르코스의 말을 인용한다. 그 인용구는 작가인 레온이 잃어버린 모든 것과 마침내 얻게 된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전해준다. “글쓰기는 꼭 필요하다. 삶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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