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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개인적인, 지극히 역사적인, ‘이터널 메모리’에 담긴 칠레의 기억

제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으로<이터널 메모리>(2023)가 선정됐다. 올해 1월 선댄스영화제에서 첫 소개된 이후 전세계 시네필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이 작품은 9월20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는 칠레의 미첼 바첼레트 정권에서 문화부 장관을 지낸 파울리나 우루티아가 남편인 언론인 아우구스토 공고라의 알츠하이머병 투병을 도우며 진행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남미의 새로운 흐름으로 부각되는 마이테 알베르디의 다섯 번째 장편 <이터널 메모리>를 통해 사라져가는 현실을 기록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을 수 있다.

한 노년 남성이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다. 그의 곁으로 다정한 목소리의 여인이 카메라를 매만진다. 여자가 남자에게 묻는 것은 자신과 그의 이름에 대해서다. 아우구스토는 현재 알츠하이머 발명으로 인해 작은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윽고 영화는 현재와 대비되는 젊은 시절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시기에 그는 검은 머리와 굵은 수염으로 ‘칠레의 영혼’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조차 구분 못하는 현재의 상태와 비견된다. 한마디로 ‘죽음’과 ‘사랑’의 극단을 영화는 한데 모으고 있다. 개인적인 관계가 묘사되는 동시에 인물들을 둘러싼 역사적인 사건들이 부각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카메라는 인물에 점점 더 다가가고, 사건의 심각성은 확장된다.

사랑과 결혼, 그리고 알츠하이머

인물들의 감정을 좀더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칠레의 역사적인 상황을 살피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1970년 칠레에서는 ‘인민연합’의 아옌데가 투표를 거쳐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빈부 격차가 심각한 상황이었고 모두가 우파의 승리를 예측하던 시기였다. 아옌데는 평화적으로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전세계 언론이 칠레를 주목했다. 냉전 시대에 혁명이나 폭동이 아닌 제도를 통해 사회주의에 도달한 드문 사례였다. 일종의 역사적 실험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희망은 빠르게 사그라졌다. 아옌데가 집권한 지 3년 만인 1973년 9월11일, 피노체트의 독재정권이 시작되었다. 희망의 칠레는 암흑기로 변한다. 대통령궁은 군부의 폭격으로 폭발됐고 아옌데는 자살했다. 의회는 정지되었으며, 모든 정당과 노동조합의 운동은 금지되었다. 이후 1989년 아일윈이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무려 17년간 피노체트의 공포 독재가 이어졌다. 미국 CIA의 내부 문서에 따면 당시 미국은 간접적으로 피노체트의 쿠데타 기획을 도왔다고 한다. 미국 회사가 소유했던 칠레의 구리광산이 국유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리고 쿠바 혁명 이후 남아메리카에서 또 다른 사회주의국가가 안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미국은 움직였다. 이러한 당대 상황을 영화는 인물의 트라우마와 연결시킨다.

아우구스토가 처음 사회에 발을 내디딘 시기는 피노체트 정권 휘하에서였다. 1970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곧장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매체의 저널리스트가 됐다. 그리고 1976년부터 격주간지 <솔리다리다드>의 편집자로 일하기 시작했고, 이후 시청각 뉴스 <텔레애널리틱스>에서 뉴스 진행을 맡았다. 해당 내용은 아카이브 필름의 형태로 영화에 삽입된다. 과거 주인공 아우구스토의 모습은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칠레 언론의 대표적인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경력을 인정받아서 1993년에 그는 칠레 국영방송(<TVN>)의 문화부문장 자리에 오른다. 이후 <TVN>의 문화 관련 프로그램 진행자로 활동하는데, 당시 모습도 영화에서 살필 수 있다. 특히 2007년과 2008년에 그는 영화감독 라울 루이스의 TV 미니시리즈 2편을 총괄 제작했다. 그중 2007년에 방송된 4부작 미니시리즈 <라 렉타 프로빈시아>에서는 잠깐 배우로도 등장했다.

한편, 아우구스토의 아내 파울리나는 어려서부터 배우를 꿈꾸던 소녀였다. 그녀는 스무살이던 1989년에 연극 무대에 데뷔했고, <TVN>이 제작한 <텔레노벨라>로 점차 이름을 알렸다. 본격적으로 그녀가 대중에 각인된 것은 2000년대였다. 당시 칠레 배우연합에서 활동하면서 그녀는 배우연합 회장직을 맡는다. 그리고 2006년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된다. 아우구스토와는 오래 기간 연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결혼식 장면은 2016년 6월17일의 기록으로, 연애를 시작한 지 거의 19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아우구스토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지 2년째 접어든 상태였다. 생각해보면 이 영화의 역사적 상황과 부부의 결혼식 장면은 묘하게 겹쳐진다. 독재의 횡포가 시작되던 즈음, 그들은 질병의 지배를 받으며 정식 부부로 인정받는다. 이러한 상황은 영화의 극적 동력으로 작용한다. 이 사랑은 가장 위태로운 시기에 이루어졌고, 평화로워 보이는 현재의 인물들에게는 어둠이 깃들어 있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과거와 소통하는 중이다. 놀라운 속도로 사라져가는 현재의 시간들을 <이터널 메모리>는 상반된 것들과 연계시킨다. 책으로 드러나는 과거의 사건들, 영상의 언어로 유비되는 감정들, 영화가 드러내는 것이 아무리 미온적이더라도 과거의 사건들이 지금의 시간을 장악한다. 마이테 알베르디 감독은 평온한 부부의 일상을 기억의 세부와 대비시키는 몽타주를 보여준다. 육체를 가까이서 프레임화하지만, 슬픔을 직접 말하지는 않는다. 대신 사건의 구체성을 르포르타주 속 대사나 기록된 문구를 통해 드러낸다. 결과적으로 끔찍한 역사의 흔적이 개인에게 투영된다. 영화의 뉘앙스가 낭만적인 것은 그런 면에서 매우 의아하다. 서로를 찾는 시선의 교차와 제스처를 통해서 영화는 그들이 몹시 행복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과거 아카이브의 이미지는 이와 상반된다. 기억을 건드리는 영화이지만, 명확하게 질병 자체를 소재로 삼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알츠하이머는 소재가 아니라 장치처럼 활용되는 것 같다. 비슷한 소재의 다른 영화들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감독은 이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파울리나와 아우구스토를 설득했다고 한다. 특히 파울리나가 완강하게 거절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마이테 알베르디가 이 작품이 ‘보편적인 영화’이고 ‘사랑에 대한 영화’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극장에서 울거나 고통받으면서 나오는 관객들은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생각해보면 이 설득은 조금 모호하다. 어쩌면 이 점이 이 영화의 특별한 부분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작 <요양원 비밀요원>(2020)의 경우와 흡사한 논리가 감독의 의도에 투영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요양원 비밀요원>의 경우, 영화는 픽션과 다큐를 절묘하게 교차시킨다. 실제 요양원이라는 표면적인 사실에 의도적인 인물이 지닌 허구가 더해져 영화는 ‘다큐드라마’로 완성된다. 흡사하게 <이터널 메모리> 역시 장르를 통합한다. 언뜻 평범한 사실성의 영화인 듯 보이지만, 이 극은 매우 의식적이다. 선택된 과거의 모습들, 책의 구절들, 그리고 매우 정갈한 질문만이 스크린에 표시된다. 그외 모든 기록은 표면뿐이다. 작은 움직임들, 그 속에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주인공의 죽음에 대해서도 영화는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관객들은 짐작할 수 있다. 만약 이 영화에 주요 이벤트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단 하나 ‘병의 지속과 가속도’만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터널 메모리>의 비범함

매우 내밀한 관계의 포착, 따스한 손길과 감정이 프레임에 담긴다. 하지만 완성된 영화는 지극히 냉정하다. 극도로 폭발하는 순간의 진실을 알리지만, 그럼에도 사건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알츠하이머의 진행에 주인공은 몹시 괴로워하지만, 어떤 등장인물도 이에 저항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역사를 바라보는 언론인 아우구스토의 시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끔찍한 현장을 방문한 인물에게 감정의 흐름은 부가적인 짐일 따름이었다. 그는 저항의 흔적을 글로 남겼다. 그는 살아남았다. 그 결과 헤어날 수 없는 트라우마가 생겼지만, 이 역시 개인의 것은 아니었다. 현실을 촬영할 것인지 촬영하지 않을 것인지를 두고 누구도 모럴을 언급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연출자의 입장에서 이 작업에 다가가는 방식도 동일하게 바라볼 수 있다. 파토스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다짐하고서야 비로소 영화는 진실을 찍을 수 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모든 어두운 것들을 영화는 밝게 채색한다. 병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둘만의 공간, 죽음의 시간으로 변화하는 새의 그림자, 남은 시간은 한정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슬픈 것만은 아니다. 인위적인 결정이지만 이보다 더 객관적일 수는 없다. 그 상태의 올바름에 대해 언급해야 하는 것은 이제 관객들이다. 칠레의 역사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은 전혀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문구는 피노체트 독재정권 당시 칠레 어느 일간지의 타이틀이었다. 같은 지면에 산티아고에서만 4천명이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흐름을 억제하려는 표면의 노력들이 어떤 결실을 맺었는지에 대해 영화에선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독재자는 비난을 받았고, 어떤 이들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지금도 움직이고 있다. 그들이 정당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적어도 진실을 강탈하지는 않았기에 그들은 휴머니즘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진실함에 다가가는 이 영화의 노력은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비범하다. 부드럽고도 공모적인 화해의 숏들, 이 작품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간극에서 발견된다.

의식은 사라지고 망각은 점점 더 개인의 영역을 침입한다. “기억이 없으면 정체성도 없다”는 영화 속 구절을 다시금 떠올린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의 결말에서 이 대사는 작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모순의 아이러니야말로 영화를 절묘하게 인간적으로 만든다. <이터널 메모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 삶의 본질을 영화가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무한하지 않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도 아니다. 죽음을 통해 어떤 창조는 빛을 발한다. 영원하지 않더라도,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맹세코 지속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우리의 기억은 영원히 진동할 것이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고 이 영화는 넌지시 알린다. 영화 <이터널 메모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어쩌면 현상의 저 너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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