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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나의 피투성이 연인’, 누구를 탓하지도 울지도 못하는, 조용한 절규를 보며
이자연 2023-11-15

이제 막 자리 잡기 시작한 신인 작가 재이(한해인)는 출판사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신작 출간을 앞두고 있다. 그의 연인 건우(이한주)는 입시 학원 영어 강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안정된 나날에 익숙해지는 중이다. 서로에게 더이상 바랄 게 없는 비혼·비출산 커플로서 동일한 신념과 가치관을 좇고 있는 줄 알았지만, 예기치 못한 뜻밖의 임신 소식으로 많은 것이 뒤바뀌어버린다. 아이 없는 삶을 살고 싶은 재이와 달리, 건우는 자신의 가족을 꾸리고 싶다는 고백을 남긴 것. 뒤늦게 건우의 진심을 알게 된 재이는 강경했던 마음을 뒤로하고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다.

영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원치 않은 임신이 다정한 연인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출산을 앞둔 여성이 어떤 일상적 차별에 노출되는지, 가족을 구성하는 과정에 어떤 성찰이 필요한지를 날카로운 단상으로 그려낸다. 재이를 둘러싼 주변인의 배려와 조언은 임신부가 아닌 아이 중심적 언어로 채워지면서 개인 재이의 존재를 흐릿하게 지워버린다. 오로지 엄마 재이만이 유효한 세상. 임신 이후 재이의 세계는 그렇게 전복되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좋은 의도와 달리 지극히 무심한 말들이 가슴을 비집고 들어올수록 재이의 소설 내용도 함께 비뚤어질 뿐이다. 누군가를 탓하기에도, 자신을 비난하기에도 모든 게 마뜩잖다.

이제는 업무 성과도 재이의 마음과 다르게 흘러간다. 아이를 가진 신체적 변화가 버겁게만 느껴지면서 책상 앞에 앉는 것조차 힘들다. 곤경이라 일컫기 애매한 곤경만이 재이 곁에 있을 뿐이다. 영화의 중반부를 기점으로 재이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무뎌진 상태에서 길을 잃는다. 직업인으로서, 연인으로서 그리고 엄마로서. 영화는 재이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내외부의 이유를 밀도 있게 풀어내면서 개인의 사적인 이야기를 세대의 이야기로 확장시킨다. 현대 여성들이 안고 있는 임신과 출산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이야기 중심축에 두겠다는 영화의 목적이 뚜렷하게 느껴진다. 압축과 생략의 묘미를 놓친 구간들이 극을 다소 지루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두 연인이 각자의 기로에서 마주하는 감정적 질주가 이야기의 압도감을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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