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살의 후키(스즈키 유이)는 늘 죽음을 머리에 이고 살아간다. 말기암 환자인 아빠 케이지(릴리 프랭키)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는 후키에게도 스며들어, 작문 시간엔 꿈에서 본 자신의 장례식 풍경에 대해 쓰게 된다. 당연히 이는 선생님의 걱정을 산다. 지난달에 후키가 쓴 글의 제목은 ‘고아가 돼보고 싶다’이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11살에 이런 글을 쓰는 건 흔치 않다”라고 조심스레 말하지만, 엄마 우타코(이시다 히카리)는 딸에게 스며든 우울감을 알아차리기보다 ‘할 일 없는 선생’이라 여긴다. 그도 그럴 것이 우타코는 남편을 간병하는 동시에 어린 딸을 먹이고 재우는 일을 홀로 맡아야 하고, 남편으로 인해 발생하는 돌발상황으로 직장 상사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터에서 자신의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고아가 돼보고 싶다는 글을 쓸 만큼 독립적이고 씩씩해 보이는 딸은 그의 우선순위에서 얼마간 벗어나 있다.
아빠가 병으로 스러져가고 엄마가 일상의 무게에 지쳐가는 동안 후키는 세상을 탐구하는 데 열심이다. 영화가 배경으로 삼은 1980년대 일본에서 유행한 최면, 텔레파시 등 초능력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영어 교실에서 친해진 부잣집 친구 치히로네에 놀러가 딸기 쇼트케이크를 맛보기도 한다. 심지어 우편함에 꽂혀 있는 폰팅 광고 지라시를 보고 겁 없이 전화를 걸어보기까지 한다. 영화 <르누아르>는 후키가 여름 한 계절 동안 사람들과 무람없이 마주치는 모습을 비추며 1980년대 거품경제 시기 일본 사회의 모순까지 슬며시 드러낸다. 이를테면 후키가 만나는 성인 쿠리코(가와이 유미)는 밤 10시까지 일하고 퇴근길에 남편이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은 모습을 발견하고, 매일 예쁘게 머리를 땋아주는 엄마를 가진 치히로도 부모의 외도로 할머니 집에 맡겨진다. 모두 저마다 혼란스러운 계절을 보내고 있다는 것. 해가 길고 만물이 푸르른 여름, 후키는 모든 이들이 자신만큼이나 여상하지만 불행한 나날을 보내고 있고, 삶과 죽음은 지극히 지근거리에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르누아르>는 영화 <플랜 75>에서 75살이 되면 국가가 안락사를 지원한다는 독특한 상상력을 선보인 하야카와 지에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제목은 거품경제 시기 일본에서 인기가 높았던 인상파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에서 따왔다. 극 중 후키는 아빠에게 르누아르의 <이레 느 카앙 당베르의 초상>모조품을 선물하는데, 병실에 걸린 그림 속 아이는 상앗빛 피부에 복숭아색으로 물들어 있고 아빠는 완연한 병색에 복수까지 차오르고 있어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하야카와 지에 감독은 제목에 대해 “서양을 동경하는 감정”, “가짜를 걸어놓고 만족하는 정신”이 당대 일본 사회를 보여준다고 밝힌 바 있어 이 아이러니는 중첩된다. 전작에서 하야카와 지에 감독이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일본을 도발적인 영화적 상상력으로 재현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다들 무언가에 열심이었지만 공허했던 시기의 일본을 아이러니를 통해 표현한다.
CLOSE-UP
영화에서 가장 애타는 순간이 지나간 뒤 후키는 터널에 서서 목소리를 울리게 하는 장난을 친다. 후키를 둘러싸고 있는 구조물은 너무 커다랗고 그의 몸집은 조그맣지만, 아이는 터널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영화 <르누아르>는 후키에게 닥친 위기들 뒤에 후키가 장난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덧붙인다. 즐거움 외엔 무용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장난을. 끈으로 묶은 물풍선 튕기기, 말 울음소리 흉내내기 등을. 아이가 자라면 자연스레 더는 하지 않을 행동들이 스크린에 새겨지면 그것은 분명 픽션 속에 존재하지만 이상하게 뭉클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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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 75> 감독 하야카와 지에, 2022
하야카와 지에 감독은 유난히 노을을 잘 그리는 감독이다. <플랜 75>에서 안락사 위기에서 극적으로 벗어난 미치(바이쇼 지에코)는 우두커니 서서 해가 저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친구들과 가라오케에서 불렀던 노래를 작은 목소리로 부른다. 비슷하게 <르누아르>의 후키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가만히 멈춰 지는 해를 바라보는 모습이 등장한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후키의 얼굴에 <플랜 75>의 노인 미치가 스치는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