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이스라엘 텔아비브로 넘어왔다. 구글맵을 들여다보다 실수로 내비게이션을 찍게 되었는데, 차로 가면 네 시간 반 만에 닿는 거리였다. 하지만 지척인 곳을 가는 직항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두 나라 모두 운항하는 항공사마저 드물어 두바이까지 가서 비행기를 갈아타야만 했다. 시리아 입국 기록이 있으면 이스라엘에 들어갈 때 곤욕을 치를 수 있고, 이스라엘 입국 기록이 있으면 시리아를 비롯해 많은 아랍 국가에 들어갈 수 없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겠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여권에 도장을 찍지 않고, ‘블루 카드’라 불리는 별지를 줘서 입국을 증명했다. 그것은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사이의 오랜 반목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시리아 출장을 마치고 곧장 귀국하지 않은 것은 국제평화운동 공동체 ‘개척자들’의 ‘브라더 송’이 팔레스타인에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였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흠모하는 어른을 만난다는 구실로, 여태 여행을 미루었던 팔레스타인에 드디어 발을 들였다. 브라더 송은 이스라엘의 만행에 신음하는 ‘마사페르 야타’ 사람들과 연대하기 위해 와 있었다. 서안 지구는 오슬로협정에 따라 세 구역으로 나뉜다. A구역은 행정과 치안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B구역은 양쪽이 나눠서, C구역은 이스라엘이 전적으로 관할한다. 마사페르 야타는 C구역으로, 헤브론 남쪽에 흩어진 베두인 마을을 일컫는다. 이스라엘은 이 일대를 군사 훈련장으로 지정하고 일방적으로 퇴거를 명령했다. 몇대째 살았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불법 거주자’가 되어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채 살고 있다.
거기에 더해 ‘정착민’이 이들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정착민은 이스라엘 정부의 지원을 받아 팔레스타인 땅에 침범해 사는 이스라엘 국민을 일컫는다. 국제법은 이를 명백한 불법으로 규정하지만, 이스라엘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특히 골칫거리는 ‘힐톱 유스’라 불리는 젊은 무리다. 폭력적인 극우주의자들. 구릉마다 ‘아웃포스트’라는 임시 거점을 세우고, 팔레스타인 마을 깊숙이 파고든다. 불을 지르고 수도관을 끊고 나무를 베어내는 일이 일상처럼 일어나고, 총격 사건까지 종종 일어난다.
마사페르 야타로 가기 위해선 차를 여러 번 갈아타야 했다. 같은 지역을 가더라도 이스라엘 사람과 팔레스타인 사람이 사용하는 길이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분리되어 있고, 대중교통 체계 자체가 달랐다. 세상에 이처럼 기괴한 동거가 또 있을까. 개척자들이 베이스로 삼은 마을은 마사페르 야타 중에서도 ‘움알케어’라는 작고 조용한 곳이었다. 시간마저 느리게 흐를 것 같은 목가적인 마을. 하지만 도착해서 가장 먼저 맞닥뜨린 풍경은 장총을 멘 이스라엘 남자가 아이를 데리고 유유히 마을을 가르는 것이었다. 비현실적이었다. 총을 메고 아이와 나들이를 한다고? 보고서도 믿기지 않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브라더 송에게 바보처럼 묻고 또 물었다. 그것은 무언의 겁박이었으리라.
마사페르 야타는 아카데미에서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노 어더 랜드>의 배경이다. 그리고 내가 마을에 머물고 있을 때, 그들의 새 다큐멘터리 <나자>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첫 상영 때 24분이 넘는 기립박수를 받았는데, 이는 역대 가장 긴 박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문화부 장관이 <나자>의 두 감독(유발 아브라함, 레이철 쇼르)의 국적 박탈을 요청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이 나라는 나에게 총체적으로 비현실감을 먹이는구나.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자국민의 국적을 빼앗겠다니!
팔레스타인에 머무는 내내 나도 철조망 안에 갇혀 있었다. 움알케어도, 그 옆 마을도, 정착촌과 맞닿은 경계마다 철조망이 늘어서 있었으니까. 귀국하기 전날엔 홀로 베들레헴에 들렀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하는 교통편으로는 버스 한번으로 가는 모양인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경로는 택시를 한번 타고, 미니버스를 두번 갈아타야 하는 지난한 길이었다. 나는 베들레헴을 포위한 콘크리트 장벽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높이가 8m에 이르는 장벽엔 자유를 갈망하는 그래피티가 가득했다. 벽과 철조망 안에 갇혀 사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최선을 다해서 상상해보아도 과연 내가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까. 무거운 마음을 안고 다시 버스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모든 승객이 버스에서 내려 검문소를 통과해야 했는데, 팔레스타인 할머니 한분은 끝내 버스에 다시 오르지 못했다. 군인은 버스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수신호를 보냈고, 버스 안에서는 청년 하나가 할머니가 아직 안 탔다고 외쳤다. 하지만 버스는 그냥 떠났다. 나는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군인과 기사와 청년을 번갈아보며 난처함을 곱씹었다.
늦은 오후 예루살렘에 도착해 호텔에 짐을 풀고 올드타운의 여러 성지를 둘러봤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메고 걸었다는 골목길, 예수님이 돌아가신 곳, 그리고 무덤이 있는 곳. 그토록 성스러운 곳에 총기 반입을 금지한다는 안내판이 즐비했고, 도시 곳곳을 무장한 군인의 지키고 있었다. 우리는 성지에서마저 총이 먼저 마중을 나오는 시절을 살아간다.
예루살렘에서 하루 잘 쉬고, 내일 한국으로 돌아간다. 카메라 안에는 무서워서 물러나 찍은 총을 든 사람들 사진 몇장과, 갇혀 사는 듯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얼굴이 잔뜩 들어 있다. 내일 출국하는 길에 불순한 사람으로 찍혀 곤욕을 치르지 않아야 할 텐데. 그러면서도 여권을 뒤적여 시리아 입국 도장이 있는 페이지에 책갈피처럼 이스라엘 블루 카드를 끼워넣는다. 그렇게 어디에도 닿지 못할 소심한 심술을 부리며 짐을 꾸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