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헌 대중음악평론가가 10월20일 64 살로 세상을 떠났다. 알려진 대로 그는 1980 년대에는 독립영화의 영역에서, 1990년대부터는 대중음악평론계에서 일했고 이후 강연과 저술, 음반과 공연 기획 일을 해오다 42살 때 큰 사고를 당한 이후 명리학 강의를 이었다. 최근에는 경기문화재단 이사, 한국문화예술교육 진흥원 이사장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 다양한 직책과 직업을 가졌지만, 그의 이름 앞에 가장 먼저 붙는 건 음악평론가였다. 저서 <전복과 반전의 순간> <신해철>을 비롯해 그는 과거 꾸준히 한국의 음악에 관해 이야기했고 또 고민 했다. 경기문화재단 취임 이후로는 ‘예술의 일상화, 일상의 예술화’라는 비전을 가지고 인프라 구축에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많은 글을 썼고, 또 평론가뿐만 아니라 행정가로서 일하는 등 여러 형태의 일을 해온 만큼 그의 흔적은 대단히 산발적이다. 어쩌면 그는 그 누구보다 가장 현재를 살아가는 데 집중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최근에 그를 알게 된 이들은 명리학을 이야기하는 사람으로서 알고 있기도 하겠지만, 반대로 아주 과거부터 그를 알았던 이들은 그가 장산곶매 활동을 필두로 짧지 않은 시간 독립영화 제작자로 살아왔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2015년 7월5일,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1980년대를 신화화하고 1990년대에 상대 적인 아쉬움을 표현했던 것 같다”고 고백하면서도 “정글 같은 세상에서 음악적 신념을 지키려는 신예들이 살아남는 데 내가 아무런 도움이 못된다는 것이 슬프다”고 고백했던 것이 인상적이며, 그의 여러 이야기 중에서도 개인적으로는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이기도 하다.
음악비평의 의미가 바뀌는 것을 넘어 가파르게 변화하는 음악 생태계 내에서 할 수 있는 것,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뜻을 가진 이들이라면 각자도생의 형태일지라도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고백건대 한국에서의 음악평론은 세대 간의 단절이 심하기에 강헌이라는 인물에 관한 평가는 훗날에야 좀더 섬세하게 진행되겠지만, 적어도 그의 문제의식만큼은 여전히 유효함을 넘어 더 많은 이들에게 과제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말과 글은 선례로서 유효하고, 여전히 현재성을 보유하고 있다. 그를 통해 꼭 해야 할 말이 하나 더 있다. 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의 태도와 방향이랄까.
평론가라는 직책이 일종의 ‘가’자로 끝나는 가짜 직업이 된 지금의 시점에서, 그의 커리어는 후발 주자들에게는 완성형 정답은 아니지만 고민을 함께해볼 수 있는 여지가 되었다. 최규성 음악평론가는 그가 2001년에 “차장님, 이 바닥에 먹을 거 별로 없어요”라고 조언했다고 자신의 SNS에 남겼다. 하지만 평론가라는 직업이 가지는 정체성에 관해 고민했을 때, 지금은 그 말 자체가 인식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글을 쓰는 것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건 예견된 수순이었다.
그래서 여러 직업을 오간 그에게 지금의 시점에서 평론가라는 타이틀은 어떤 의미인지 꼭 한번은 묻고 싶었다. 이 직업에 종사한다는 대부분이 다양한 일을 하고 있는 요즘이다. 나 또한 영화제 프로그램 노트도 쓰고, 디자인 매체에도 글을 쓰면서 과연 나는 음악평론가라는 타이틀을 여전히 써도 되는지, 혹은 쓴다고 해서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묻는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는지 고민하다 그가 걸어온 길을 보며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지고는 했다.
그는 시대를 읽고 움직인 평론가였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앞으로 좀더 진득하게 해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