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원작자 · 각색자 · 감독 · 주연배우 존 카메론 미첼 인터뷰
2002-08-10

˝드랙퀸을 연기하면서 자유를 얻었다˝

서면으로 질문을 보내고 답을 기다리기 며칠. 아뿔싸, 존 카메론 미첼이 ‘떠나버렸다’는 전갈이 왔다. 인터뷰에 답을 쓰고서? 아니다. 그는 모든 인터뷰를 거부하고(좀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얼마나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그냥 그거 보고 쓰라고 그래!”라는 엄청난 말을 남기고) 얼마 동안이 될지 모를 여행을 떠났다는 거다.

존 카메론 미첼은 2001년 <헤드윅>이 발표되었을 당시 실로 엄청난 양의 인터뷰에 응했다. 영화잡지, 일간지, 게이잡지, 온갖 온라인 매체, 음악잡지 등 <헤드윅>이 걸쳐져 있는 모든 영역- 영화, 음악, 성정체성, 팬덤, 일반 뉴스- 의 언론매체들에서 그에게 이야기를 걸어댔다. 그런 모든 시끌벅적한 일들을 끝내고 당분간 연기마저 쉬며 조용히 아동영화의 대본을 쓰고 있던 그는, 갑자기 어느 날 ‘광희’의 나라 한국에서 인터뷰가 날아들자 떠나버린 것이다. 할 수 없이, 그의 바람대로, 2001년 영화 발표 당시 존 카메론 미첼이 응했던 수많은 인터뷰 중 주목할 만한 문답을 간추려 여기 싣는다.

헤드윅이나 앵그리 인치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었나.

앵그리 인치는… 내 친구 중에 성기가 작은 사람을 앵그리 인치라고 하는 친구가 있었다. 거기서 땄고, 헤드윅이라는 이름은 헨리크 입센의 희곡 <들오리>에서 땄다. <들오리>의 주인공 헤드비 에크달(Hedvig Ekdal)은 너무나 정직해서 파괴당하는 14살짜리 인물이다.

<헤드윅>은 처음 어떻게 시작됐나.

커버송 <오리진 오브 러브>(Origin of Love)의 모놀로그를 짓는 것이었다. 실제 드랙퀸들이 모인 클럽에서 난 드랙퀸 차림을 하고 앉아서 대본을 써나갔다. 드랙 복장을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난 그때까지 드랙을 해본 적도, 록을 해본 적도 없었다. 그전까지 내가 했던 건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TV가 다였다.

어떻게 동베를린 출신의 드랙퀸 이야기를 생각하게 됐나.

아버지가 장군이었다. 1984년부터 88년까지 서베를린에서 미군 사령관으로 근무했는데, 그때 대학생이었던 나는 베를린 장벽을 넘어 종종 동베를린에 가곤 했다. 군용차를 타고 군복만 입고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우리집에는 52개의 방이 있었고 경비원과 집사, 프랑스인 요리사 등 9명의 사람들이 고용돼 있었다. 밤이면 나는 크로이츠베르크 구역의 바들과 펑크 게이바들에 가곤 했다. 베를린영화제에도 갔다. 나는 바에서 만난 사람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맨션에서 함께 저녁을 먹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시위에 가담해 미군을 향해 날계란을 던진 대학생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헤드윅은 우리 가족이 워싱턴에 살 때 우리집의 베이비시터로 일하던 미군 부인인 독일 여성에게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미군과 결혼해 한국을 떠났다가 이혼을 당한 한국 여자들에게서도 힌트를 받았다.

성전환수술이라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었나.

온갖 갈라진 것들… 플라톤 신화 속의 갈라진 자아, 베를린이라는 갈라진 도시, 그런 것들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갈라진 성을 가진 자들이 모이는 드랙클럽에서 그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베를린은 수백만명이 사는 도시인데, 왜 당신만….

(말을 끊으며) 성전환수술을 떠올렸냐구! 난 어린 시절을 떠돌이로 지냈다. 옮겨다니는 생활은 사람의 다른 반쪽을 발견하게 한다. 나에게는 어느 것도 영원해 보이지 않았고 어떤 것도 진리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었다. 가히 포스트 모던한 양육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나.

난 연극을 별로 경험하지 못했다. 가톨릭 기숙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하지만 스코틀랜드며 독일이며 캔자스를 옮겨다니며 산 덕에 여러 악센트를 익힐 수 있었고, 그래서 배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어린 나는 그저 만화책과 과학소설을 좋아하는 좀 웃긴 애였다. 연극을 본 건 나중의 일이다.

영화는 어떤가.

내가 자라던 1970년대는 상업영화도 작품성이 있는 때였다. <야전병원 매쉬>와 <뜨거운 오후> <내쉬빌> 같은 영화가 히트를 했고, 그 영화들이 바로 영화의 지표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모든 것이 예술적으로 바뀌었는데, 한마디로 쓰레기가 됐다. 바이올런트 펨므, 허스커 두, REM 같은 굉장한 밴드들이 있긴 했지만 대중적이진 않았다. 난 1980년대 초에 커밍아웃했는데, 그것은 나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세상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커밍아웃은 특히 날 음악에 대해 열리게 만들었고, 내 자신이 되게 했다.

<헤드윅>에는 이기 팝, 데이비드 보위, 루 리드 풍의 음악이 있다. 미국인으로서 글램록과 그 문화에 친숙해지기는 어려웠을 텐데.

1973년에 스코틀랜드의 가톨릭계 기숙학교에 다닐 때 나는 글램록을 처음 접했다. 가톨릭 소년들의 학교 세계에서 나는 계집애 같은 아이였다. 거기선 음악은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학교의 도서관 담당이었는데 거기엔 작은 레코드 플레이어가 있었다. 의 <톱 오브 더 팝스>에 나온 보이는 나를 무섭게 했다. 나는 위저드, 슬레이드, 스위트 같은 밴드에 빠져 있었다. 나는 도서관에 스위트(우리에겐 <Love is Like Oxygen>으로 유명한- 편집자)의 <폭스 온 더 런> 싱글 레코드를 몰래 가지고 들어가 작은 스테레오에 그 판을 올려놓고 헤드폰으로 그 음악을 들었다. 그런데 폭발했다. 도서관 문을 잠근 채, 삶과 악마에 관한 책들을 두들겨대며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춤을 췄다. 그 레코드는 당시 나를 살렸다…. 나는 돌아와서 록시뮤직의 1집을 들었다. 완전히 나가떨어졌다. 믿어지지 않았다. 미국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당시의 분위기를 모를 것이다. 내가 아는 한 <벨벳 골드마인>의 감독이자 내 친구인 토드 헤인즈가 글램록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유일한 미국인이다.

영화 캐스팅은 어떻게 했나.

밴드를 캐스팅하는 건 굉장히 재밌는 일이었다. 우리는 오디션을 많이 했는데, 가짜 언어를 오디션 참가자들에게 시키는 장난을 치기도 했다. ‘기버리시’어라구…. “음, 기버리시로 조크를 한번 해보세요. 아주 특별한 것이어야 해요. 그리고나선 그걸 슬로베니아 사투리로 번역해요,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영어로도 하구요.” 제일 시간이 많이 걸린 건 토미 역 배우를 찾는 거였다. 후보자들 가운데는 아주 불가사의하게 섬뜩하게 생긴 남자들과 진짜로 잘생긴 남자들이 있었는데, 난 토미가 어떤 느낌의 록스타여야 할지 잘 결정을 못했다. 그러다가 마이클 피트를 발견했다. 딱이었다. 그는 백스트리트 보이즈의 고트 버전이라 할 만하다. 그는 정말 틴 아이돌 스타가 될 만하지 않은가.

영화에 나오는 멋진 애니메이션에 대해 알려달라.

연극 버전에서, 나는 <오리진 오브 러브> 노래를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드로잉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관객이 노래의 가사를 빠뜨리지 않고 듣기가 힘드니까. <오리진 오브 러브>는 그 내용이 아주 명확하게 전달돼야 하는 메인송이고 작품 전체의 핵심이다. 2500년이 된 플라톤의 신화를 바탕으로 하는 노래인데, 난 그 이야기를 LA에서 연극으로 처음 알게 됐다.

<헤드윅>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록키 호러 픽쳐쇼>인가.

아니다. 아마 <헤드윅>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록키 호러 픽쳐쇼>와는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을 거다. 오히려 <헤드윅>과 비교할 만한 작품은 <올 댓 재즈>다. 노래가 먼저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물랑루즈>와 비슷하지만, 노래들이 각각의 장면 속에서 동기화되거나 때때로 판타지 자체라는 점에서는 <올 댓 재즈>와 더 비슷하다. 다른 뮤지컬과는 비슷한 점이 별로 없다. <카바레>나 <더 그레이트 로큰롤 스윈들>도 언뜻 생각해볼 수는 있지만 아니고, <내쉬빌> 같은 경우는 노래가 내러티브가 아니라는 점에서 다르다.

당신은 당신의 반쪽을 찾았나. 헤드윅에게 토미 노시스처럼.

몇년간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가 있다. 헤드윅은 결국 자기자신이 그동안 자기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의 총합임을 알게 된다. 더이상 자신을 조각으로 여기지 않고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된다. 토미도 그녀의 반쪽이었다. 토미의 이름은 그노시스파의 복음서에서 땄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똑같은 쌍둥이를 가지고 있는데, 예수의 인간적인 면을 가진 쌍둥이가 토마스라고 나와 있다.

당신의 전설적인 팬클럽 ‘헤드헤즈’의 정체는 무엇인가.

헤드헤즈는 12명으로 시작했다. 뉴저지의 지방검사 사무실 비서, 평범한 보통여자들, 아직 커밍아웃하지 않은 게이 십대소년들, 몇명의 로큰롤러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쿠키를 만들어 갖고 오기도 했고 극장 안내인으로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다. 그들은 <헤드윅>의 아주 진지한 팬이었다. 예를 들어 도나라는 팬은 <헤드윅>을 450번이나 봤는데, 450번째 왔을 때 우리는 그녀가 항상 앉는 좌석에 그녀의 이름을 새겨넣어주었다. 아직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한 고등학생들에게는 <헤드윅>의 공연장이 대피소와도 같았다.

당신에게는 어떤 성공모델이 있나.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루 리드가 이뤘던 것 같은 것? 브라이언 이노는 언젠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데뷔 앨범을 샀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 앨범을 산 사람은 모두 밴드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헤드윅>으로 이제, 당신은 당신 자신을 찾은 것 같나.

그렇다. <헤드윅>을 하면서 나는 자유를 얻었다. 정말이지 드랙퀸을 연기하는 건 치유효과가 있는 것 같다. 드랙이라는 것은 순전히 그것을 하는 사람의 창조물이고 어떤 차용도 아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몇년간 연기는 쉴 생각이다. 더 재미있는 게 따로 있기 때문에. 난 몇년 동안 연기를 하며 재미있게 살았고 언젠가는 배우 일에 컴백할 것이지만, 지금은 더이상 연기에서 스릴을 못 느낀다. 사람들은 이제 나를 보면 “아, 헤드윅이구나” 할 것이다. 그건 나쁜 일은 아니다. 내가 배우가 아닌 작가로서 혹은 감독으로서 일할 때 사람들이 나를 헤드윅으로 기억한다는 건 말이다. 지금 난 인디밴드 뉴트럴 밀크 호텔의 줄리언 코스터와 동화작가 로알드 달 풍의 <그랜마폰>이라는 아동용 애니메이션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대본을 쓰고 있는데, 아마 연출도 하게 될 것 같다. 거기에도 노래가 있다. ‘비치 보이스와 피어 우부에 몸담았던 닥터 수스’가 할 것 같은 음악이다. 조금 과격하지만 아이들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재미있는 영화가 될 것이다. 또 하나는 ‘제목이 정해지지 않은 노골적인 섹스 프로젝트’라고만 정한 비디오다. 엄청난 분량의 노골적인 섹스를 담지만 관객을 울고 웃고 자극할 수 있는 내용이다. 최수임 sooeem@hani.co.kr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