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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 앤 프린세스 Princes et Princesses
2001-05-02

프린스 앤 프린세스

Story

어둠이 내린 낡은 영화관. 변신 마술 기계를 가진 늙은 영사기사와 소년, 소녀는 여섯개의 짧은 동화를 짓고 직접 이야기 속 인물이 된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착한 왕자가 개미들의 도움으로 목걸이를 되찾아 공주를 구한다. 두 번째 일화의 주인공은 한겨울에 열린 무화과를 진상해 상을 받는 순수한 소년과 이집트 여왕.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온갖 공격에도 끄떡없는 마녀의 성을 친절한 마음으로 간단히 여는 청년이 나온다. 네 번째 일화의 꼬부랑 할머니는 괴력으로 도둑을 실컷 골탕먹이고, 다섯 번째 이야기에서 살생을 일삼는 고독한 여왕은 새 조련사의 구애를 받는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키스할 때마다 온갖 동물로 탈바꿈하는 왕자와 공주의 곤경을 그린다.

Review안데르센이 <그림없는 그림책>을 썼다면, 프랑스 애니메이션 작가 미셸 오슬로의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그림자로 그린 그림책’이다. 갈피갈피 넘기다보면 마치 다락방에서 달님이 들려주는 흐뭇한 천일야화를 듣는 듯 호젓한 공기가 폐에 스며드는 점도 같다. 전작 <키리쿠와 마녀>에서 셀과 종이 위 이미지를 컴퓨터로 콜라주했던 미셸 오슬로는 <프린스 앤 프린세스>에서는 검정 도화지와 가위, 색 전구 조명이 설치된 테이블이 들어찬 간소한 실루엣 애니메이션 작업실로 돌아갔다. 이렇게 쓰여진 그림책을 읽어주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버려진 영화관에 비밀스런 그들만의 스튜디오를 꾸민 소년과 소녀. 이들은 친구이자 교사격인 영사기사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마법의 기계장치로 옷만 갈아입으면 고대 이집트의 백성으로, 중세의 마녀로 탈바꿈해 시공을 가르는 매직 카펫 라이드를 시작한다. 아이디어를 내고 캐릭터를 디자인하는 과정을 막간극으로 삼아 총 6막으로 구성된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제목이 제목이니만큼 에피소드마다 왕족이 하나둘 등장하지만 주역이 꼭 그들의 몫은 아니다. 오히려 가난하지만 선하고 슬기로운 청년이, 지체 높고 아름다우나 고독 속에 갇힌 처녀의 마음을 얻는 스토리가 여섯편 중 네편을 채운다.

첫 에피소드는 111개의 흩어진 다이아몬드를 찾아 목걸이로 엮어줄 왕자가 나타날 때까지 저주에 감금된 공주의 이야기. ‘성취욕’으로 무작정 달려든 왕자들은 실패하지만, 그녀를 구해주고 싶다는 진심을 품은 왕자는 성공한다. 마법에서 풀려난 공주가 모래시계를 깨고 사랑의 영원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설정이 의미심장하다. 세밀하게 오려낸 구조물과 스테인드 글라스도 눈길을 머물게 한다. 고대 이집트로 거슬러올라간 두 번째 에피소드는 가진 거라곤 무화과 나무뿐인 소년과 마음이 메마른 여왕의 이야기. 모두가 뭔가를 얻기 위해 여왕을 알현하지만 소년만은 겨울에 열린 무화과를 여왕에게 주고 싶다는 단순한 바람으로 그녀를 찾는다. 오슬로 감독이 사랑해 마지않는 고대 이집트 미술의 정면성을 잘 살린 캐릭터, 태양신의 나룻배, 해먹모양의 나뭇가지 등 디자인적 묘미가 탁월하다.

감독의 창작 스토리인 세 번째 ‘마녀의 성’ 에피소드는 산뜻한 반전의 러브스토리. 마녀의 성문을 열면 공주를 주겠다는 왕의 포고령에 권력자는 사람을 부려 온갖 공격을 가하지만 마녀의 성벽은 끄떡없다. 이를 지켜보던 신중하고 지혜로운 젊은이는 정중한 단 한번의 노크로 성문을 연다. 그리고 그저 무례함을 싫어했을 뿐 기계 설계와 야채수프 끓이기를 즐기는 빗자루 머리의 말괄량이 성주를 만난다. 변신로봇 같은 성곽이 재미난 볼거리.

작은 구멍과 전구 불빛으로 다이아몬드를 표현하고, 베일과 말린 꽃의 반투명한 소재를 활용하는 등 전반의 3부에 걸쳐 실루엣 애니메이션의 넓은 폭을 보여준 감독은, 네 번째 에피소드에 이르면 19세기 일본의 판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에게서 빌려온 듯한 풍경 속으로 이야기를 끌고 들어가 호롱불 켜진 장지문의 반영과 계곡의 물안개를 망라하는 그림자의 번짐과 농담(濃淡)까지 스크린에 살려낸다. 그림동화에서 착안한 ‘잔혹한 여왕’편은 외로움에 중독된 나머지 살생의 숨바꼭질을 멈추지 못하는 여왕의 이야기. 서기 3000년의 기술시대로 옮겨진 배경과 중세 음유시인의 노래 같은 음악의 묘한 어울림이 마치 차가운 금속이 심장을 스치는 듯한 쓸쓸함을 자아낸다. 마지막 6화는 ‘개구리 왕자’ 우화의 현대적 개정판. 별이라도 서로에게 따다 주겠다던 왕자와 공주가 입을 맞출 때마다 다른 짐승으로 변하자 당황한다. 전통적인 왕자-공주동화를 뒤집고 연애의 속내를 꼬집은 에필로그다.

<프린스…>는 성인 애니메이션 관객에 대한 신뢰에 기댄 작품으로 더빙판 없이 자막판만 개봉되지만, 그래도 어린이들에게 권하지 않을 수 없는 양질의 엔터테인먼트다. 우수한 아동문학 작품이 그렇듯 <프린스…>는 가장 기초적이고 간명한 단어들로 재미와 운율을 건져올린다. 보통의 ‘왕자-공주’동화마냥 돈많고 잘생긴 남녀의 만남이 곧 행복이라는 생각을 부추기지 않을까 근심할 필요도 없다. 오슬로의 주인공들은 비록 2차원의 납작한 그림자지만 미덕과 결함을 갖춘 개성의 소유자다. 어디 그뿐인가. 그림자의 과묵함이 얼마나 풍부한 언어를 갖고 있는지, 절제된 한두 가지 색이 얼마나 다채로울 수 있는지 깨닫는 기회는 우리의 눈뿐 아니라 정신에도 소중한 양식이다.

김혜리 기자 verme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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