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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신문 제9호(1925~1926) [2]
이유란 2003-03-24

영화사신문이 만난 사람 |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오데사의 계단을 본 순간, 하나의 에피소드로 갔죠”

에이젠슈테인의 두 번째 영화 <전함 포템킨>이 소련에서 재개봉한다. 1926년 1월18일 모스크바에서 개봉한 <전함 포템킨>은, 그러나 흥행 부진으로 몇주 만에 간판을 내렸다. 하지만 독일에서의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어 새롭게 인식된 이후 재개봉에 이른 것이다. 차기작 준비로 바쁜 에이젠슈테인을 만나 <전함 포템킨>이 그간 어떠한 험로를 헤쳐왔는지, 그 이야기를 들었다.

첫 시사회 때 관객의 열기는 엄청났다. 그런데 어쩌다 몇주 만에 종영이 됐나.

→ 정말 그랬다. 박수소리가 볼쇼이 극장에 메아리쳤다. 난 완전히 흥분한 상태였다. 하지만 개봉 뒤엔 사정이 달랐다. 일반 관객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내 경쟁자들은 <전함 포템킨>이 일반 관객이 접근하기 어려운, 위대한 다큐멘터리라고 주장했다. 극장주들은 <전함 포템킨>을 내리고 오락성과 상업성이 훨씬 더 강한 영화들을 걸었다.

반면 독일에서는 대중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는데. 평론가들의 극찬도 쏟아졌다. 막스 라인하르트는 이 영화를 보고 “이제 연극이 영화에 길을 내줄 때가 됐다”라고 말했다고 들었다.

→ 독일에서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애초 베를린영화검열소는 이 영화에 상영금지 처분을 내렸다. 독일의 막스주의 작곡가 에드문드 메이셀이 <전함 포템킨>의 음악을 작곡했다는 것도 빌미가 됐다. <전함 포템킨>이 독일에서 상영될 수 있었던 건 공산당이 설립한 프로메테우스 영화사 덕이다. 프로메테우스는 끈질긴 상영투쟁으로 검열소로부터 상영허가를 받아냈다. 오데사 계단에서 유모차가 굴러떨어지는 시퀀스와 극적인 클로즈업을 포함해 4분이 삭제된 채로. 하지만 공식 개봉 전, 이미 볼 사람은 다 봤다고 하더라.

<전함 포템킨>은 1905년 혁명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1905년 혁명에서 포템킨 수병들의 반란이 특별히 중요하다 판단해서인가.

→ 아니다. 사실 나도 내가 이 영화를 만들 줄은 몰랐다. 제작진을 이끌고 흑해에 있는 오데사항에 도착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원래 내가 만들기로 한 영화는 1905년 혁명 전반을 파노라마처럼 담는 것이다. 제목도 이었다. 예정대로라면 나는 모스크바에서 시베리아, 코카서스 등 적어도 서른곳에서 촬영해야 했다. 하지만 오데사에 도착해 그 계단을 보는 순간, 항구로 뻗어내려오는 그 무수한 계단을 보는 순간, 어떤 영화적 가능성을 느꼈다. 그 강렬한 느낌을 떨치기 힘들었다. 또 다른 곳에서 촬영을 했다간 완성 기일을 맞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예, 이 하나의 에피소드에 집중하기로 했다.

1923년에 발표한 논문 <어트랙션 몽타주>에 토대해 이 영화를 만들었는데.

→ 어트랙션이란 특정한 효과를 내기 위해 임의로 선택된 것의 독립적인 효력을 가리킨다. 넓게는 하나의 에피소드나 하나의 장면이, 좁게는 독백, 노래, 춤이 다 어트랙션의 구성단위가 될 수 있다. 어트랙션 몽타주란 말 그대로 어트랙션들을 자유롭게 조립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빚어지는 충돌이 관객의 정서에 자극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유럽배우 할리우드 진출 러시독일 UFA, 파라마운트 등과 협정… 에밀 야닝스 등 미국행

유럽 영화인들의 할리우드 러시가 잇따르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독일 영화인들의 행보. 1926년 UFA의 파산을 막기 위해 미국의 파라마운트-UFA-메트로 사이에 체결된 파루파멧(Parufamet) 협정은 독일 영화인들의 발걸음을 부추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무르나우의 <파우스트>와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를 제작하느라 빚더미에 올라앉은 UFA는 파산을 면하기 위해 파라마운트와 메트로에 각각 지분의 25%를 넘기는 조건으로 400만달러를 빌렸다. 협정이 체결되자 할리우드는 UFA 소속 영화인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였다. 배우 에밀 야닝스, 폴라 네그리, 촬영감독 칼 프룬드, 감독 무르나우 등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흥미로운 것은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제작진이 대거 이주했다는 사실. 곧 배우 콘라드 바이트, 시나리오 작가 칼 마이어, 제작자 에리히 폼머가 그들이다.

파루파멧 협정 체결 이전에도 할리우드 제작자들은 조직적으로 유럽에서 재능있는 인재들을 찾아왔다. 1923년 <뒤바리 부인> 성공 이후 메리 픽포드 주연의 <로지타>를 연출하기 위해 에른스트 루비치가 미국으로 간 것은, 이주의 시작을 알리는 본격적인 신호탄이었다. 스튜디오 대표들은 정기적으로 유럽을 방문해 최근작들을 섭렵하며 인재들을 발굴해왔다. 1925년 6월 할리우드로 간 스웨덴 감독 모리스 스틸러와 배우 그레타 가르보가 그러한 사례로, 베를린에서 이들이 만든 <괴스타 벨링의 이야기>를 본 MGM 간부들이 이들과 계약을 체결했다. 유사하게 해리 워너는 헝가리 감독 미할리 케르테츠의 초기작 2편을 보고 그를 고용했다. 미할리 케르테츠는 마이클 커티스로 이름을 바꾸고 1926년 7월 미국으로 날아갔다.

■ 부음

프랑스영화의 두 거목, 떠나다

1925년, 프랑스영화의 개척자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우선 대코미디언인 막스 렝데가 10월30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아내 엘레나를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찰리 채플린이 떠돌이 찰리를 창조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그는 ‘찰리의 귀족 버전’이라 할 만한 외모로 <막스…>로 시작되는 무수한 코미디들에 출연해왔다. 렝데에 앞서 고몽의 대표 감독인 루이 푀이야드가 2월26일 신작 <스티그마타> 촬영을 끝낸 직후 사망했다. 사인은 복막염. 흥행과 비평에서 대성공을 거둔 <팡토마> <흡혈귀> 등의 연작영화를 만들어, 전세계적으로 연작영화 붐을 가져오기도 했던 그는 앨리스 기에 이어 고몽의 제2대 총감독으로 일하며 고몽의 기반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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