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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치 않는 주제들의 대중적 친화력,<그녀에게>

■ Story

식물인간이 된 발레리나 알리샤(레오노르 발팅)를 담당하고 있는 남자 간호사 베니그노(하비에르 카마라)에게는 평소 흠모해오던 알리샤를 돌볼 수 있게 된 것이 생애 최고로 기쁜 일이다. 그로서는 사랑을 하는 중이다. 여자 투우사 리디아(로사리오 플로레스)를 취재하러 갔다가 사랑에 빠졌던 저널리스트 마르코(다리오 그란디네티) 또한 소에 받혀 식물인간이 된 리디아 때문에 병원에 온다. 같은 사정을 가진 베니그노와 마르코는 서로 우정을 나누지만, ‘여자친구’의 엇갈리는 운명에 따라 두 남자의 운명도 서로 엇갈린다.

■ Review

코마 상태의 여자를 사랑해서 결혼까지 하겠다는 남자 이야기. 이건 사실 기이한 강박증이고 호러영화에나 어울릴 법한 소재다. 그런데 알모도바르 감독은 이 시원찮은 남자에게 숭고한 사랑의 서사를 부여한 뒤 다시 모든 것을 미세한 분말처럼 가공해서, 마치 아기 피부에 스며드는 고급 영양크림처럼 보는 이의 가슴에 스며드는 멜로드라마로 만들어냈다.

어떻게 이런 발상이 가능했을까. 인간은 대개 삶과 죽음 사이에 줄을 하나 죽 그어놓고 이쪽 아니면 저쪽을 사유한다. 물론 귀신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어차피 건널 수 없는 경계라는 전제 위에서 만들어진다. 알모도바르는 특이하게도 삶과 죽음 사이에 그어진 그 줄 자체를 유심히 응시한다. 그리고 줄 위에 걸쳐져 있는 존재를 발견한다. 이른바 식물인간이다. 우리가 두려워하고 귀찮아하는 이 존재에 대해서 알모도바르는 특별한 방식으로 주목한다. 바로 식물인간의 살아 있는 몸을 매개로, 사랑의 육체성을 이야기해보는 거다. 살아 있는 몸(알리샤)을 돌보고 애무하고 그 몸이 예전에 좋아했던 것들을 대신 체험해본 다음에 자상하게 들려주는 사랑의 행위(베니그노). 영화 <그녀에게>는 이 커플이 얼마나 근사한지를 그럴듯하게 꾸며 보여준다. 이건 사실 능청맞은 코미디다.

그러나 알모도바르는 이 유머러스한 로맨스가 아늑한 공상에 안주하도록 놓아두질 않는다. 그는 이 사랑이 은폐된 한에서만 지켜지며, 노출되는 순간 하나의 질병 혹은 범죄로 받아들여지고 격리되리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친구’인 마르코조차도 베니그노에 대해 연민은 갖고 있지만 베니그노의 사랑이 관념적이라고 생각한다.

여행 전문 저널리스트인 마르코는 섬세함과 현실주의를 겸비한 캐릭터다. 그는 폭 넓고 예민한 정서 덕분에 리디아와 베니그노의 특이한 내면에 접근할 수 있었지만, 현실주의 때문에 식물인간이 된 자신의 연인을 사실상 포기한다. 그는 기적과도 같은 증거가 눈앞에 나타난 다음에야 ‘그녀에게 말을 걸라’(Talk to her, 스페인어의 원제 Halbe con ella는 이런 맥락에서 왔다)던 베니그노를 진심으로 이해한다. 너무 늦은 시간에. 마치 우리처럼. 이렇게 해서 이야기는 비극이 된다.

주인공들은 모두 무언가에 감금되어 있다. 여자 투우사의 스캔들을 캐내려고 악귀처럼 달려드는 텔레비전 진행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치부되는 식물인간 등 여성이 일차적인 희생자로 시작한다. 이어서 그 여성들에 대해 연민과 사랑을 갖게 된 남성들이 차례로 감금된다. 감옥에 갇힌 베니그노는 말할 것도 없고, 마르코 역시 알리샤에게 접근하지 말도록 요구받는다. 그런데 사회체제의 관용없음을 다루는 알모도바르의 방법이 너무나 부드러워서 고통마저도 감미롭게 여겨진다.

이처럼 알모도바르의 시선은 현실(real)로부터 붕 떠오르되(sur) 낮은 높이에 체공하면서 현실을 다시 바라본다. 이 짓궂음과 통찰을 쉬르리얼리즘(surrealism), 초현실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그녀에게>가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적 그림이나 안토니오 가우디의 분방한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것은 비단 스페인 출신이라는 공통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특성이 멜로드라마 장르와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있다는 것도 <그녀에게>의 커다란 특징이자 힘이다. ‘아트영화’로 낙인찍힐(?) 만한 요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친화력이 강한 것은 멜로드라마의 힘일 것이다. 이 틀 안에서 알모도바르는 육체성, 욕망, 사랑과 성, 사회적 편견 등 만만찮은 주제들을 편안하면서도 탐미적으로 풀어나간다. 사실 멜로드라마에 대한 경애는 알모도바르를 명망있는 대부분의 영화작가들과 구별짓는 중요한 속성인 것으로 보인다.

신파조 섞인 사실주의 톤으로 극을 끌어가는 배우들의 능청도 이 유머러스하면서도 비극적인 멜로드라마에 단단히 기여한다. 특히 하비에라 카마라는 영화의 절대적인 중심이다. 단순하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베니그노의 외모뿐만 아니라 눈빛과 목소리, 손길 등 모든 것이 베니그노식 사랑을 표현하면서 카메라를 자기 정서대로 끌고 다닌다.

한 작가가 이보다 더 나은 작품을 낼 수 있을까 두려워지는 상태. 알모도바르는 지금 절정에 도달한 것 같다. 가장 대중적인 매체 안에서 가장 대중적인 장르를 취해 키치적인 악동으로부터 대중예술가로 정련해간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영화를 넘어서서 스페인이 배출한 여러 분야의 최고 예술가들과 나란히 거론될 만하다.

:: <그녀에게> 속 예술

지적이고 감각적인

<그녀에게>는 다양한 예술 장르들을 영화 안에 직접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사고를 당하기 전의 알리샤와 딱 한번 대화를 했던 베니그노는 알리샤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들을 섭렵하고 다닌다. 병원으로 돌아와서 알리샤에게 들려주기 위해서다.

그런 편력 중 하나가 흑백무성영화 <애인이 줄었어요>(Shrinking Lover)다. 여성과학자를 사랑하는 알프레도는 애인이 개발 중인 약품을 들이마신 뒤 몸이 점점 작아지는 부작용을 겪는다. 손가락만한 크기로 줄어든 나머지 애완용 인형처럼 애인의 몸을 더듬다 못해 드디어 여인의 몸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자궁 속으로의 퇴행이라는 남성 콤플렉스를 시각화한 이 기막힌 유머는 알모도바르 자신이 직접 만들어서 영화 안에 7분 분량으로 삽입한 것이다.

피나 바우쉬가 직접 공연한 무용은 이 영화의 앞과 뒤를 열고 닫는다. <카페 뮐러>가 영화의 첫 장면으로 사용되었는데 무대 위에 있는 두 여성의 고통을 눈물지으며 바라보는 객석의 두 남성까지 연결지음으로써 영화의 상징적인 서두 기능을 맡도록 했다. 근년의 피나 바우쉬는 한 도시에 오래도록 머물며 창작한 ‘세계 도시 시리즈’를 발표 중인데, 이 영화의 끝장면에 삽입된 것은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배경으로 한 ‘마주르카 포고’다. 짧은 분량이지만 연극과 무용의 경계를 통합적으로 확장한 피나 바우쉬의 혁신성을 맛볼 수 있다.

가장 친숙한 것은 ‘쿠쿠루쿠쿠우우’ 하는 비둘기 울음소리가 인상적인 <비둘기>(Cucurrucucu Paloma)라는 노래. 19세기 스페인의 작곡가 이라디에르가 쿠바를 여행하던 중 하바네라 음악에 매료되어 만든 곡으로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에도 나온다. 이 영화에서는 브라질 출신의 카에타노 벨로소가 직접 출연해서 불렀는데, 여자 투우사 리디아의 강인한 섹시함과 공존하는 감상적인 슬픔, 죽음의 전조를 환기시킨다. 이 노래를 듣기 위해 극장 표를 구입한다고 해도 아깝지 않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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