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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의 말,말,말
이다혜 2003-10-22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인간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한마디 감동적인 말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말’의 힘이다. 그 말의 힘은 한 개인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세상을 바꾼다. 하지만 아름다운 말이 악마의 얼굴로 돌변하면, 세상을 뒤틀고 한 개인을 파멸로 이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듯이 어느 순간 만들어진 풍문과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번져나간다. 항상 세상의 법칙은 천사보다 악마의 힘이 강한 법이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말이 내닫는 속도는 전광석화와 같고, 종횡무진 방향을 잡을 수 없어서 바람과 같다. 그리고 말은 대개 족보가 없다. 어느 집 자식인지, 양반인지 쌍놈인지 알 길이 없다. 쌍검을 차고 마구 휘두르며 돌아다니는 정체불명의 무법자다. 그 위력에 한번 휩싸이면, 헤어날 길이 없다. 오로지 죽음뿐이다. 대개 그 죽음은 의롭지 못하다. 온갖 구설수와 불명예를 안고 장례식을 치르게 된다. 족보가 없는 자식인지라 누구의 위로도 구설픈 곡(哭)도 없다. 황량한 벌판에 쓸쓸히 묻히고 나면, 그뿐이다.

충무로의 말은 그 어떤 말보다 날렵하기로 유명하다. 그리고 대개는 더럽고 치사하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랴”는 전설이 아니라 충무로복음 1장1절에 나오는 진리다. 그래서 어떤 말이 전해지면, 누구든지 쉽게 믿고 잘 따른다. 구설수에 휘말려 한번 당해본 사람이면 충무로복음을 집어던지고 무신론자가 되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충무로 말씀을 열렬하게 신봉하는 독실한 신자들이다. 가라사대 누구누구가 어떻게 됐다더라, 누가누구에게 사기당했다더라, 누가 이상한 일을 했다더라, 누가 당신을 씹더라…. 도마 위에 올려져 칼질을 기다리고 있는 재료는 제작자, 투자자, 감독, 배우, 스탭 할 것 없이 형형색색으로 뒤엉켜 있다. 칼질을 하는 사람이나 칼질을 당하는 사람이나 누가 요리사고 누가 재료인지 도저히 알 길이 없다. 문제는 칼질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주고 싶은 소중한 음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씹어서 버려야 할 쓰레기 음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칼을 든 요리사인 당신이 한번 먹어보시라. 그 맛이 어떤지.

친구로서 허물없이 지내는 모 감독과 술자리를 할 때다. 얼큰하게 취할 무렵 느닷없이 눈알을 부릅뜨고 공격적인 질문을 던졌다. “야, 이승재! 너 후배감독이 엄마 병원비 좀 도와달랬는데 안 줬다며?” “걔가 임마! 가난한 집 자식이지만 얼마나 의리있고 능력있는 놈인데, 왜 안 도와줬어?” “어, 무슨 말이야! 누가 그래?” “야! 누가 그랬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임마, 왜 안 도와줬냐구?” 이런 상황에서 그 후배감독과 나 사이에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설명한다는 것은 구차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사연의 전말과 상관없이 엉뚱한 전설이 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이런 개인적인 사연은 아주 사소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충무로에서는 하루에도 몇번씩 어떤 회사가 망해서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그리고 어떤 작품이 촬영에 들어갔다 말았다 한다. 캐스팅은 말할 것도 없고, 충무로의 사람들은 전설의 왕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전설은 옛 시대의 야사가 아니라 지금의 정사다. 한편의 영화가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그 숱한 전설과 풍문의 회오리를 뚫고 지나가야 한다. 그래서 감히 개성장군의 화려한 입성은 장하고 부러운 것이다.

작은 소망이 있다면, 내가 비록 전설의 왕국에 살더라도 좀더 멋있고 신나는 전설에 파묻혀 살고 싶은 것이다. 신데렐라의 화려한 꿈은 아닐지라도 소박하고 진실한 사람들의 전설을 전하고 나누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영화를 만드는 소중한 힘의 원천이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꿈꾸어 본다.이승재/ LJ필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