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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치있는 공상오락영화,<싸이퍼>

■ Story

실직 회계사였던 모건 설리반(제레미 노덤)은 다국적 기업 디지콥의 사원이 되어 출장을 간다. 모건은 출장 중에 신비로운 여인 리타(루시 리우)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모건이 디지콥의 계략으로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일러주면서 해독제를 건네준다. 디지콥의 경쟁사 선웨이에 위장잠입한 모건은 신분이 발각나지만, 오히려 선웨이를 위해 일할 것을 종용받는다. 하지만 모건은 디지콥과 선웨이 사이에서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 Review

올해 부천영화제 폐막작으로 한국을 찾았던 빈센조 나탈리는 <싸이퍼>에 대해 “프란츠 카프카가 쓴 제임스 본드로, 정신분열증에 걸린 007”이 주인공이라고 설명했다. 카프카를 빗대는 건 분명 지나친 자화자찬인 셈이지만, 정신분열증에 걸린 007이라는 표현은 이 영화에 대한 재치있는 비유이다. <싸이퍼>에서 무기력한 남자 모건 설리반은 다국적 기업 디지콥에 들어가면서 자신감을 되찾아 스스로도 이해 못할 활기로 넘쳐난다. 지워버리고 싶은 패배자의 모습을 뒤로하고, 쾌활하고 유능한 사원 ‘잭 더스비’라고 스스로를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리타의 도움으로 자신이 기억과 정체성을 잃어가는 약물에 중독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때부터 모건은 자신을 이용하려는 두 경쟁사 디지콥과 썬웨이를 오가며 이중의 산업스파이 노릇을 한다. 천하무적 007이 세계를 휘젓고 다니며 질서를 잡는 자라면, 영화의 주인공 모건은 외부의 조정으로 엉클어진 그 질서 속에서 정신상태를 되찾고자 고군분투하는 자이다.

영화 속에서 모건이 기억과 정체성을 잃어가긴 하지만, 이건 본질적인 혹은 존재론적인 문제에 접근하기 위한 과정이기보다는, 약물의 힘을 빌려 악랄하게 산업정보를 캐내려는 거대 기업들간의 수단과 결과에 더 가깝다. 그러므로, 정체성과 기억이라는 면에 걸려들어 <블레이드 러너>가 제기했던 미래사회적 문제들을 이 영화에서 굳이 보고자 노력할 필요는 없다. 모건에게 약물을 투여한 뒤 시시각각 그를 조종하면서 상황을 조작하는 기업의 감시체제, 즉 이름과 아내와 지위 그 모든 것이 가짜라는 점에서 <싸이퍼>는 <트루먼 쇼>의 섬뜩함과 맞닿는 점이 있다.

혹은 <싸이퍼>의 주인공이 놓인 상태로만 본다면 히치콕 영화의 제목을 빌려 ‘모건의 곤경’이라 부르는 편이 더 어울릴 수 있다. 모건이 이중의 산업스파이가 되는 이유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그 ‘곤경’의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빈센조 나탈리는 이 영화가 히치콕을 모방하고 있다고 자해석하고 있으며, 각본가 브라이언 킹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바로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라고 고백한다. 영화 속에서 썬웨이 시스템 지하기지에 가기 위해 황량한 풀밭에 남겨진 모건이 잠시 멀뚱하게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분명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한 장면이 얼핏 지나가긴 한다. 하지만, 빈센조 나탈리가 그런 오마주에 특별한 열정을 갖고 있는 것 같진 않다. 그는 지나친 오마주보다는 재치있는 클리셰를 더욱 선호한다.

장편 데뷔작 <큐브>(1998)에서도 보여줬듯 빈센조 나탈리의 영화가 갖는 ‘오락적인’ 장점은 특별히 무거운 주제를 영화 속으로 가져오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주인공이 처한 곤경이 신의 간섭에 의해서이거나, 인류의 과대망상적 발전이라는 거시적 문제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큐브>에서 인물들이 갇혀 있던 그 곳은 과학자들이 고안하여 만들어놓은 거대한 실험상자이다. <싸이퍼>의 모건이 처한 상황 역시 기업가들이 부려놓은 정보 캐내기의 술수일 뿐이다. 이 영화에서 반전의 재미를 주는 모건과 리타의 관계 역시 그 이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 무서운 상황에 처해 보는 것, 그 상황을 시각화하는 것이 빈센조 나탈리 영화의 재능이다. <큐브>에서 거대한 폐쇄 공포증적 회로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던 인물들처럼 <싸이퍼>의 주인공 모건 설리반은 썬웨이 지하기지(지하 몇 십층이나 되는) 꼭대기에 매달려 고소공포증에 시달려야 하는 상황을 맞는다. <큐브>에서 보여준 질식할 것 같은 공간감이 높이를 타고 올라와 한 순간 손을 놓을 경우 가루가 돼버릴 것 같은 수직의 공포로 재탄생한다. 예상보다는 덜한 짜임새이긴 해도 <싸이퍼>는 물고 물리는 질문의 플롯과 시각적인 상상력의 힘이 더해진 재치있는 공상오락영화로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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