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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로맨스, <사랑할 때 버려야할 아까운 것들>
김혜리 2004-02-10

나이 든 조커와 나이 든 애니 홀의 아주 귀여운 로맨틱코미디

낸시 마이어스 감독은 전작 <왓 위민 원트>와 마찬가지로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에도 아주 실용적이고 친절한 제목을 붙였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류의 서점 처세술 코너의 남녀관계 지침서나 <코스모폴리탄>의 기획기사에 자못 어울릴 법한 제목인데, 이러한 작명법은 실제 낸시 마이어스 영화의 속성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말하자면 그의 로맨틱코미디에는 잡지 편집자의 감각이 있다. 이는 고전 스크루볼코미디의 위트와 리듬을 계승한 노라 에프런에 비하면 훨씬 느리고 성긴 대사를 보완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마이어스의 로맨틱코미디는 캐릭터를 창조하는 작업 못지않게 오늘날 구애와 짝짓기의 세계에서 실제로 이슈가 되는 상황을 끌어들이는 데에 공을 들이며 타깃 관객층도 그만큼 구체적이고 분명하다.

<사랑할 때…>의 헤드라인은 노년에 접어든 전문직 독신 남녀들의 데이트 게임. 서른 미만의 미녀만 상대하며 화려한 싱글로 살아온 바람둥이 음반 제작자 해리 샌본(잭 니콜슨)과 이혼 이후 데이트 대신 글쓰기로 저녁 시간을 보내며 평온한 삶을 누려온 극작가 에리카 배리(다이앤 키튼)가 게임의 맞수다. 딸의 남자친구 자격으로 에리카의 별장을 방문한 해리는 민망하게도 섹스 직전 심장발작을 일으키고, 에리카는 팔자에 없는 간병인 역할을 떠맡는다. 무시와 혐오를 오가는 최초의 단계를 지난 두 사람은 우연한 동거를 통해 볼 것 못 볼 것 보아가며 상대의 매력에 끌린다. 게다가 일이 짜릿해지려니까, 해리의 담당의사인 젊은 줄리안(키아누 리브스)의 눈에도 에리카가 대단히 섹시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세상에는 주연배우의 매력에 감응하는 관객과 그렇지 않은 관객이 마치 다른 두편의 영화를 본 듯 평판이 갈리는 영화가 있는데,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도 그 부류다. “우리 참 귀엽지 않아요?” 라는 주인공의 대사에 동의하느냐 마느냐의 여부는 그래서 결정적이다. 다이앤 키튼과 잭 니콜슨의 연기에 “아직 정정하다”는 뉘앙스의 칭찬은 모욕이다. 에리카와 해리는 꼭 집어 그들의 현재 외모와 연륜을 요구하는 캐릭터이며 시나리오의 걸맞은 지원을 받는다.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은 다이앤 키튼 안에 잠들어 있던 원조 ‘귀여운 여인’ 애니 홀을 다시 불러낸다. 키튼은 여전히 매너리스트다. 그녀의 상현달 모양 눈에 수시로 스쳐가는 의례적 미소와 망설임, 사랑스러워 보이려는 본능적 표정은 조금 부담스럽지만 에리카가 해리와 다가감에 따라 서서히 자연스러워지는 컨트롤이 일품이다. 오래간만의 실력 발휘로 골든글로브 주연상까지 받은 키튼과 달리 잭 니콜슨은 <버라이어티>의 표현대로 “본인으로 출연”해 숨쉬듯 연기한다. 연하 여성들과 연애 편력으로 유명한 그로서는 평생을 바쳐(?) 준비한 역할인 셈이니 무리도 아니다. 덤으로, 자다 깬 니콜슨의 헤어스타일은 질리지 않는 개그다.

<사랑할 때…>에서 ‘섹스에 따르는 책임’은 피임이 아니라 적정 혈압의 유지다. 같이 신음하고 같이 속울음을 터뜨리는 노년의 베드신은 통쾌하고 심지어 감동적이다. 그보다 조용하지만 마이어스는 침실 밖에서도 두개의 근사한 장면을 연출한다. 밤참으로 팬케이크를 구워먹으며 에리카와 해리가 잡담을 나누는 장면이 그 하나. 젊은 딸이 갑자기 들이닥쳐 대화를 끊어놓는다. 둘의 대화는 사소한 것이었고 딸의 훼방은 전혀 폭력적이지 않지만 관객은 순간 모든 것이 망가진 느낌을 받는다. 마법은 사라지고 두 사람은 갑자기 늙어 보인다. 또 하나는 젊은 의사가 에리카에 대한 동경을 이성에 대한 사랑으로 확신하는 대목. 일 관계로 걸려온 전화에 명랑하게 응대하는 에리카의 억양과 표정을 말없이 관찰하는 줄리안의 반응만으로, 마이어스 감독은 연상녀에 대한 매혹을 거의 납득시킨다.

그러나 <사랑할 때…>는 할리우드가 찬밥 취급하는 노년의 로맨스를 다룬 스스로의 용기에 지나치게 감격하는 눈치다. 영화가 진심으로 노년이 섹시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여기에는 환상적인 해변 별장, 눈 내리는 파리 같은 호사스런 장식과 변명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을 테고, 노안과 비아그라에 관한 농담도 한번으로 족했으리라. 모든 참사랑의 징후에도 불구하고 존 F. 케네디 대통령 재임기 무렵부터 갈고 닦은 해리의 카사노바 인생철학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리 없다. 경험 많은 두 남녀가 행복한 거리를 유지하는 연애를 추구하다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각자의 길을 갔다면 제목에도 더 어울리는 원숙한 드라마가 되고, 상영시간도 대폭 줄었겠으나 만사가 소망대로 되지는 않는 법. 중반까지 로맨틱코미디 고유의 연애 승부에 집착하지 않던 시나리오는 막판에 유럽까지 날아가 기어코 짝짓기의 팡파르를 울린다. 에리카는 어른스런 젊은 남자를 버리고 아이 같은 늙은 남자를 택한다. 이리하여 낸시 마이어스의 영화에서 또 한번 철없는 여피 남성은 성장하고 여성은 귀여운 남자를 위해 행복한 ‘베이비시터’의 직분을 수락한다.

:: 감독 낸시 마이어스 인터뷰

늙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

낸시 마이어스는 1976년부터 전남편 찰스 샤이어와 팀을 이루어 <벤자민 일병> <신부의 아버지> <베이비 붐>을 쓰고 제작했다. 샤이어와 결별한 이후 <페어런트 트랩>으로 감독 데뷔했고 <왓 위민 원트>로 역대 여성 영화감독 영화 중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다. 대중화된 버전의 페미니즘에 입각한 로맨틱코미디가 장기다.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쓰는 본인의 작업을 묘사한다면.

에리카의 서재를 보면 이해하기가 편할 것이다. 내 방을 그대로 옮겨놓은 셈이니까. 나도 에리카처럼 집필할 때만 입는 옷이 있다. 아침 10시부터 집필을 하고 같은 음악을 30∼40번씩 틀어놓는 경향이 있다. 사실 난 로맨틱한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캐릭터들의 무드를 표현하자면 음악이 꼭 필요하다.

젊은 여성만 데이트하는 남성들을 풍자하기 위해 주인공 해리를 설정했나.

그렇지 않다. 에리카 역시 젊은 남자와 사귄다. 이 영화는 나이 차이가 많은 커플을 풍자하려는 것이 아니라 중년 남녀의 관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것이었다. 코미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두 성인의 사랑을 다룬 드라마로 봐줬으면 한다.

중년 남녀를 주인공으로 한 이유가 있나.

나도 50살이 넘었지만 나이를 먹는 데 대한 항의를 하려고 이 영화를 만든 건 아니다. (웃음) 사람들이 늙어가는 모습을, 그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사랑을 그리고 싶었다. 특히 할리우드에서는 지난 5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강한 여성상은 많이 보여주었지만 사실적인 여성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다이앤의 캐릭터가 사실적일 수 있도록 노력했다.

제작 과정에서 힘들었던 일은.

중년 남녀의 사랑 이야기라는 점, 이들의 로맨스가 파리에서 이루어지는 마지막 부분의 설정도 문제가 됐다. 현재 미국에서는 아직도 프랑스에 대한 반감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를 넣은 영화사 세곳 중 두곳은 최종 결정자가 여성이었고, 한곳은 남자였다. 남자 대표는 설정 때문에 프로젝트 추진을 어려워했고, 다른 두곳은 흔쾌히 참여 의사를 밝혔다.

다이앤 키튼과 잭 니콜슨의 누드장면이 나오는데.

다이앤과 잭 모두 두말없이 촬영에 임해줬다. “각본에 나오는 누드장면, 전에 말했는지 모르겠는데, 전신 누드 촬영이거든?” 이라고 했더니, 다이앤은 “영화에서 내 나이의 여자가 꼭 벗어야 한다면, 내가 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라고 말하더라. (웃음) 촬영 중에는 잭의 엉덩이 누드를 찍던 날이 가장 재미있었다. 잭에게도 역시 누드장면을 찍기 위해 사정사정할 필요가 없었다.

뉴욕=양지현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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