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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고지

이른바 국제화 시대를 맞이하면서 영어경쟁력은 국가경쟁력의 지표가 되었다. 심지어 우리는 ‘국제화 시대’를 간판으로 내걸기 전부터 외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으로 영어교육을 해왔고 그 덕분에 영어의 중요성은 입을 막 떼기 시작하는 유아를 포함하여 전 국민이 공감하는 바이다.

교육방송의 영어교육 전문프로그램이 아니어도 매주 민병철, 이보영, 이근철 등 권위있는 명강사가 출연해서 영어의 달인이 되기까지 자신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고 누구나 웃으면서 또 웃기면서 영어학습의 비법을 배워보는 오락성의 프로를 보자 있자니 끈질긴 국제화 시대로의 진입욕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 같아 화끈거렸다. 우리 영어실력의 향상을 위해 초빙된 것은 국내의 명강사들만이 아니었다. ‘미친 영어’ 열풍을 드넓은 중국 대륙에 휘몰아치게 한 리양 선생까지 기꺼운 마음으로 출연해서 열강을 해주었다. 그의 진단은 어쩌면 너무도 정확해서 뼈에 사무치는 것이었다. “아시안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부끄러움입니다.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영어 발음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죠. 큰소리로 연습하고 외치면 자신감도 생기고 굳어진 아시아인의 근육을 국제근육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저 서구의 언어를 그토록 흠모하고 동경하면서도 입도 뻥끗하지 못하는 이유는 영어에 맞는 구강의 ‘국제근육’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창한 영어는 정확한 발음부터 시작하는데 그러자면 영어발음을 위한 근육부터 키워야 하는 것이다. 리양의 발음훈련법을 따라 우리는 소리를 마구 질러대었고 그러면서 내면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던 비영어권인의 비애를 마구 발산할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그가 왜 아시아인의 영어학습에 돌풍을 일으키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세력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지만 그 속으로 편입해 보려는 거대한 에너지가 한편으로 무섭고 한편으로는 서글픈 순간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감성詩대>라는 코너가 시작되었다. 각박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시를 통해 따뜻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주기 위해서 국내 최고의 시인들이 그들의 시 세계를 공개하고 시를 쓰는 비법 속에 들어 있는 세상에 대한 통찰력과 아름다운 마음을 키우는 지혜를 배워보는 시간이란다. 김용택 시인은 너무도 아름다운 자작시를 정겹게 낭독해주었고 함께 출연한 게스트들도 시제에 따라 시를 지어서 읽어주었다.

시란 가장이나 꾸밈이 아니라 진실이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쉽게 쓰여지고 읽히는 시가 좋은 시라는 그의 작법이 틀렸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어란 시인이 몇날 밤을 지새웠는지 모르는 공력과 조탁에 의해서 비로소 빛이 나는 것임을 안다면 ‘쉽게 쓰여지는 시’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시집 한권이 삼천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어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함민복 시인의 <긍정적인 밥> 중에서) 사람들 마음을 따뜻하게 덮어줄 한 그릇의 국밥만큼이라도 되려고 애쓰는 이 땅의 모든 시인들에게 시가 너무도 가볍고 너무도 재미있는 무엇으로 각인되는 그 순간을 준다는 것이 나는 안쓰러웠다.

그래서 한참을 고민했다. 왜 영어를 배우는 힘겨운 노력과 우리말로 된 아름다운 시작 코너를 동시에 연결했는지를. 내 생각에 영어와 시는 진정으로 내면화되지 못한 무엇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1교시>는 그것에 대한 희화화를 통해 일시적인 소유감과 통쾌함을 느끼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국인은 아직 진정한 영어권의 국제화 시대에 들어가려면 먼 길을 가야 하며 기획자들이 꿈꾸는 감성의 시대로 들어가려면 아직도 시인의 수가 부족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 외부의 실질을 얻기 위한 구강의 국제 근육도 내적인 충실함을 쌓기 위한 심성의 깊이도 우리에게는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김용택 시인은 “나의 치부를 가장 많이 알고도 나의 사람으로 남아 있는 이/ 나의 가장 부끄럽고도 죄스러운 모습을 통째로 알고 계시는 이”를 ‘나’를 가장 사랑하는 이로 정의하고 ‘나’는 그런 당신의 사랑이고 싶다고 노래한다. 그러나 나는 내 밖의 사랑으로 나의 치부와 부끄럽고 죄스러운 모습을 우습게 감추려고 하지 말고 ‘나’의 적극적인 노력과 반추로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믿는다. 그때 비로소 <대한민국 1교시>의 내면화되지 못한 것을 희화화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는 발걸음을 뗄 수 있지 않겠는가.

素霞(소하)/ 고전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