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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과 민족의 영광을 위하여?

갑신년 3월1일, 9시 뉴스는 심란했다. 내가 본 것은 KBS였지만, MBC라고 SBS라고 다르지 않았을 터다. 먼저 대통령이 일본에 일침을 가했다. 10대 소녀는 태극기를 품에서 꺼내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목놓아 외쳤다. 그 옆의 아저씨는 눈물을 글썽였다. 동원된 군중이 아니었다. 번개에 나온 시민들이었다. 삼일절뿐이랴. 전국 방방곡곡에서, 시도 때도 없이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전 국민의 우국지사화가 한창이다. 왜 대통령은 꼭지가 돌았는가? 누가 아저씨를 울렸는가? 무엇이 소녀를 오버케했는가?

반칙왕 오노가 원흉이다. 한민족의 애국심은 오노 사건으로 불붙고, 월드컵으로 후끈 달아오르고, 촛불시위로 활활 타오랐다. 이승연 사건도 어설픈 사기꾼들이 반일감정에 기대 한탕 챙기려다가 민족감정에 된서리를 맞은 웃지 못할 촌극으로 보인다.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로 달려간 1천만 관객의 가슴에는 ‘조국은 그들을 버렸지만, 그들은 조국을 버리지 않았다’는 교훈이 오롯이 남아 있다. 우리의 조국은 너무도 위대해서 눈에 보이지 않고, 의혹의 눈초리도 받지 않는다. <조선일보>에서 <한겨레>까지 일심단결해 태극전사를 찬양하고, 95%의 국민이 이승연에게 돌을 던진다. 설마 너나없는 ‘국민 방송’이 가만히 있으랴.

오늘도 방송은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다. 각종 경제지표에서 중국이 남한을 따라잡았다는 소식은 주요 뉴스가 된다. 그 뉴스를 말할 때면 아나운서의 목소리마저 자못 심각해진다. 도대체 12억 인구의 중국 자동차 생산대수가 5천만의 남한을 앞질렀다는 것이 왜 우울해할 일이며, 어떻게 경종을 울릴 사건인가? 그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돌연 쾌활해질 때도 있다. 예컨대 삼성전자가 소니를 따라잡았다는 소식을 전할 때다. 삼성전자는 어느새 대한민국 대표선수가 됐다. 국민 모두가 삼성전자의 영업실적과 경영수익을 걱정한다. 광고는 감동적인 선전문으로 심금을 울린다. “일본 휴대폰이 되는 곳은 일본 땅이고, 한국휴대폰이 되는 곳은 한국 땅입니다.” 심심하면 하는 국가대표 대항전에서도 ‘대한민국’이라는 위압적인 국호가 뜬다.

‘굿 뉴스’로 애국심을 고취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다국적 기업, 네슬레가 한국 이유식 시장에서 자기 브랜드를 포기했다는 ‘굿 뉴스’를 전했다. 눈을 돌려 광고를 보라. 이 땅 곳곳에서 굿 뉴스가 넘쳐난다. 야후는 네이버와 다음에 맥을 못 추고, 월마트가 이마트에 밀리는 ‘이상한’ 나라다. ‘내셔널’ 브랜드 만세!

물론 소녀의 오버에는 이유가 있다. 일본은 과거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을 자꾸 되살린다. 심심하면 망언을 일삼고, 툭하면 야스쿠니에 간다. ‘야마’ 돌지 않을 수 없다. 제국의 발톱도 한반도를 할퀸다. 용산에서 못 나가겠다고 버티질 않나, 범죄자를 숨기지 않나, 핵무기 내놓지 않으면 전쟁난다고 위협하지 않나, ‘양키 고 홈’이 절로 나온다. 요즘엔 중국까지 거든다. 고구려사를 강탈당했다는 항변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부활하는 일본 군국주의와 승하는 중국 제국주의 사이에서, 한반도의 민족주의는 날로 번성하고 있다.

나라 안도 속 터지기는 마찬가지다. 갑신년 삼일절 뉴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반북의 성지’가 된 시청 앞 광장에서 수천명이 친북세력 척결을 외치면서 성조기를 흔들었고, 친일진상규명특별법은 차떼고 포떼고 해서 누더기가 돼버렸다. 미완의 역사청산은 민족문제를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묘하게도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친일과 친미가 얽히고 설키면서 민족감정을 ‘업’시키는 형국이다. 그래도 오버는 오버다. 나는 그 소녀의 울부짖음과 아저씨의 눈물이 무섭다. 그 눈물에는 관용보다는 적대의 함량이 높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꽤 컸는데, 감히 누가 우릴 건드려? 이렇게 말하는 그들의 표정이 무섭다. 그 배타적인 감정이 ‘월드컵 세대’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에서 공포를 느낀다. 또한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서로를 겨누는 동북아의 미래가 우려스럽다. 집단주의에 집단주의로 맞서는 한반도의 풍토가 짜증스럽다.

나는 이 풍토에 방송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가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수의 것이면 무엇이든 지지하고, 대중이 원하면 무엇이든 한다. 이것이 한국 언론의 감수성이다. 이 나라에 진정한 파퓰리스트가 있다면, 그것은 노무현이 아니라 언론이다. 민족의 이름으로, 소녀를 울리지 마라.

신윤동욱/ <한겨레> 기자 syu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