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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적 공간 속 여성의 불안한 욕망에 관한 보고서, <인 더 컷>
김용언 2004-04-27

의식의 흐름을 관념의 흐름과 동일시하는 건 옳지 않다.’ 여성들이 왜 불안한 열정에 기꺼이 빠져드는가에 관한 제인 캠피온식 보고서

독신 여성 프래니(멕 라이언)는 학교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흑인 속어집을 만들기 위해 제자 코넬리우스로부터 외설적인 비속어들을 수집하고 있다. 코넬리우스를 만나기 위해 들렀던 ‘레드 터틀’ 바에서 한 남녀의 오럴섹스 장면을 목격한 프래니는 야릇한 충격을 받는다. 얼마 뒤, 형사 말로이(마크 러팔로)가 그녀를 찾아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여자가 끔찍하게 살해됐음을 알려주며 이것저것 캐묻는다. 프래니는 말로이의 팔에 새겨진 문신을 보고 오럴섹스를 즐기던 남자의 팔에 똑같은 문신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그리고 살해당한 이웃집 여자가 바로 그 바에서 남자와 함께 있던 그녀임을 알게 된다. 말로이와 격렬한 섹스를 나누며 쾌락의 절정을 느끼는 프래니는 점점 불안해진다. 말로이가 정말, 여자들의 목을 도려내고 장기까지 들어내는, 그리고 그녀들의 손가락에 결혼 반지를 끼워두는 그 살인범일까?

수수께끼 같은 제목, <인 더 컷>(In The Cut). ‘베기, 벤 상처, 새긴 금, 절단’의 뜻으로 해석되는 ‘컷’은 또한 여성의 성기일 수도 있다. 여자의 목을 면도날로 잘라버리는 연쇄살인의 잔혹한 방식과 억눌린 욕망을 분출하는 여성의 성기의 결합. 다시 말해 섹스와 폭력의 무서운 결합은, 어쩌면 남성 감독의 시선이었다면 ‘이빨 달린 질’의 이미지로 표현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인 캠피온의 관심사는 전형적인 타입들을 내세우며 전통적 장르를 계승하는 데 있지 않다. 그녀는 사이코 연쇄살인범이 연약한 여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사이코스릴러가 주는 스타일과 느낌을 빌려왔을 뿐이다. 그러니까 스릴러이기 때문에 ‘비일상적’일 수 있는 스타일과 그 장르 특유의 긴장감과 불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딜 수 없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은밀한 쾌감이야말로 캠피온이 추구하는 섹스와 폭력, 남성과 여성 사이의 영원히 좁힐 수 없는 간극 속(인 더 컷?)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더없이 어울렸던 것이다.

무엇보다 제인 캠피온은 영화 전체의 룩을 결정짓는 공간의 구축에 심혈을 기울인다(제인 캠피온은 한 인터뷰에서 이스트 빌리지가 인도를 연상시키는 흥미로운 공간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뉴욕의 이스트 빌리지 뒷골목에는 더러움과 아름다움이 혼재한다. 영화의 오프닝신에서 보여지는 뒷골목의 풍경, 쓰레기 봉투와 온갖 외설적인 낙서로 혼재한 그곳이지만 땅바닥에는 빨간색 꽃이 그려져 있다. 프래니가 사는 아파트 앞뜰은 꽃잎이 눈보라처럼 휘날리는 환상적인 공간이지만 그곳에서는 가끔 여자의 잘린 머리가 발견되기도 한다. 초현대적인 건축물들이 솟아 있는 뉴욕의 낮은 근사하다. 그러나 밤거리의 그곳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온통 외설적이고 오컬트적인 기표들이 난무한다. 이곳에서 진정으로 안도감을 느끼며 살아가거나, 프래니와 그녀의 이복동생 폴린이 꿈꾸는 진정한 로맨스를 찾기란 거의 요원해 보인다.

그리고 캠피온은 카메라로 이 모든 풍경을 담아낼 때 주의 깊은 테크닉을 사용한다. 욕망에 들떠 헐떡거리는, ‘알면서도’ 위험 속으로 자진해 걸어들어가며 은밀한 무의식을 탐구하는 프래니와 일심동체가 된 듯, 카메라는 때때로 땀을 흘리는 듯 보인다. 화면은 군데군데 얼룩져 있고 흐릿하게 포커스가 나가 있다. 그것은 마구 점프하고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마인드 스케이프로서의 프레임- 그 형식 자체가 아름다움과 잔인함의 공존을 표현한다(그리고 그것은 문제의 ‘스케이트장신’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인 더 컷>은 최근 나온 스릴러 중 가장 스타일리시하며, 그 스타일이 단지 스타일에만 그치는 치기를 보여주지 않는 균형을 유지한다(영화 속 욕망에 대한 분석을 라캉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또한 영화의 형식미는 라캉이 언제나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던 ‘스타일, 형식’에 대한 괜찮은 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분석은 분석가들이 불구로 만들어놓은 텍스트 속에서 그들의 편견에 거부하는 문체(resist-style)를 개발해야 하고, 거부하는 문체라는 그 허구적 형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

<인 더 컷>은 제인 캠피온의 최고작은 분명 아니다. 여기에는 <스위티> <내 책상 위의 천사> <피아노>나 <홀리 스모크>가 주었던 쇼킹한 참신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캠피온은 여성이 에로틱스릴러라는 장르를 어떻게 전유할 수 있는지의 한 예를 제시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랑 결혼해 줄래?” 혹은 “당신을 사랑해”라는, 대부분의 (이성애자) 여성들이 꿈꾸는 낭만적 사랑에 관한 환상의 궁극이 어떻게 그것을 무참하게 파괴하는 남성들과의 보이지 않는 전투 속에서 새롭게 재구성될 수 있는지를, 그녀는 초현실적이리만치 아름다운 공간과 형식 안에서 스릴러의 형식으로 이야기한다(그러므로 <인 더 컷>을 보고 난 뒤 “이게 무슨 스릴러야!”라고 비명처럼 불평을 터뜨리는 건 온당하지 못하다). 그녀는 점점 더 데이비드 린치와 비슷해지고 있다.

:: 원작과 영화 사이

“아티스트로서 나는 <인 더 컷>의 주제에 매혹되었다”

<인 더 컷>은 수잔나 무어의 4번째 소설이었다. 1995년 이 작품이 출간되자마자 무어의 열렬한 팬들은 충격받을 수밖에 없었다. <퍼블리셔스 위클리>의 리뷰에 따르면 그녀의 전작들(<나의 옛 연인>(My Old Sweetheart), <유골의 결백함>(The Whiteness of Bones))은 하와이에 거주하는 가족들의 뒤틀린 일상을 다루고 있었다. 하와이라는 지역이 품고 있는 영혼과 전통들이 스멀스멀 인간사에 침투하여 좀더 관능적이고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인 더 컷>에서 무어는 장소와 주제를 완전히 바꾸었다. 뉴욕의 웨스트빌리지(영화에선 이스트 빌리지로 바뀐다)에 사는 지적인 여성 프래니가 겪는 끔찍하고 에로틱한 모험담을, 무어는 마치 칼날을 벼리듯 정확하고도 치밀한 강렬함으로 구성하였다. <인 더 컷>을 집어든 독자들은 섹스 행위의 적나라한 묘사와 외설적인 언어의 난무, 끔찍하리만치 정밀하게 묘사된 폭력을 내내 감수해야만 했다.

소설 속의 프래니는 영화에서보다 훨씬 명확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녀는 이혼한 적이 있는 뉴욕대 교수이며, 게토의 젊은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흑인들의 속어와 거리의 방언들을 꾸준히 채집한다. 그녀는 정서적인 혼란으로부터 스스로를 안전하게 지키는 닫힌 세계 속 사람이다. 대신 섹슈얼한 위험은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다. 말로이와 처음 만나 섹스를 나누면서, 그녀는 말로이가 이끄는 대로 점점 더 이전까지는 가보지 못했던 경계선들에 도전하는 에로틱한 탐험에 미친 듯이 빠져든다.

<인 더 컷>을 1996년에 처음 접한 캠피온은 어쩌면 픽션보다 훨씬 미스터리어스하고 잔혹한 현실세계와 끊임없이 경쟁하는 수잔나 무어의 용감함에 매혹되었다. 하지만 영화화를 생각하기 시작한 건 훨씬 나중에서였다. <빌리지 보이스>와의 인터뷰에서 캠피온은 “이걸 영화로 만든다면 마치 내가 미움받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고 고백한다. “내가 프래니가 될 수 있을까에 관해 계속 자문해보았다. 솔직히 정말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티스트로서 나는 그 주제에 매혹되었다. 프래니를 나의 주인공으로 삼는다는 가능성 앞에서 나는 언제나 주저하고 동시에 열망하는 모순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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