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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를 만나고파, <아는 여자>

건달, 주변의 ‘아는 여자’들 중에서 천사를 알아보는 눈을 갈구하다

살면서 오랫동안 버리지 못했던 꿈 중 하나가 천사를 만나는 것이었다. 의식적으로 기획하고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내 안의 어떤 결핍은 시도 때도 없이 멀리 있는 누군가를 향해 맹목적으로 흘러가고자 했다. 나의 선의를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어떤 존재에 대한 막연한 갈망. 나는 천사를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천사를 만나는 방법을 몰랐다. 대학 때는 이왕이면 한적한 안면도의 겨울 바닷가에 이나영 같은 얼굴로 천사가 나타나주기를 바랐다. 그런 일은 없었다. 서른 즈음에는 출장가는 비행기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근사한 여자를 의식해서 12시간 내내 잠과 싸웠다. 혹시 침을 흘리거나 코를 골지 않을까 싶어서. 그 모습을 혹시 천사일지도 모를 이 여자가 보면 어쩌나 싶어서. 이 무렵에는 만나는 여자마다 천사가 아닐까 재고 찔러보고 계산하느라 분주하게 잔머리를 굴려댔다. 그 지난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천사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남이 보면 한심하고 본인은 참으로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다. 그런데 더욱 억울한 것은 삽십대 후반이 되니 천사를 만나겠다는 투지도 기력도 사라지더라는 것. 이보다 더더욱 억울한 것은 천사는 애초에 지상에 없는 허깨비라는 것을 시간이 가르쳐주더라는 거다.

그런데, 세상에 완전한 공짜가 없듯이 완전한 탕진도 없는 모양이다. 나는 마흔이 넘은 요즘 다시 천사 판타지를 갖게 됐다. 그 계기는 몇년 전 안면도 민박집에서 만난 도사님이다. 나이가 나보다 네댓살 아래인 이 도사는 유학을 공부하면서 부업으로 점을 치는 사람이다. 술을 마시다가 그가 나보고 물었다. “새가 새대가리인 이유를 아십니까?” 나는 속으로 정말 한심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 답했다. “개가 개대가리이기 때문에 새는 새대가리가 아닙니까.” 그 도사가 말했다. “새는 날개가 있기 때문에 새대가리가 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새는 날개가 있어서 위기에 처하면 일단 날고 보기 때문에 머리가 발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가 다시 물었다. “천사가 날개가 있는 이유를 아십니까.” 나는 이번엔 가만히 있었다. “천사는 머리를 비웠기 때문에 날개가 돋아난 겁니다.” 그는 인간이 머리가 좋은 것은 손이 있기 때문이고, 뭔가 도구를 거머쥐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머리가 발달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인간은 손이 있기 때문에 머리를 비울 수 없고, 그 손 때문에 날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럴듯했다.

이 도사의 논리를 응용해서 천사를 만나는 방법을 제시하면 이렇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이기 때문에 천사를 만나려면 먼저 천사를 알아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손의 사용을 현저히 줄여야 한다. 특히, 남보다 더 적게 투자하고 더 많이 갖겠다는 의도로 도구를 사용해서 남을 치는 행위를 삼가야 한다. 야구방망이, 몽키스패너, 사시미칼과 같은 흉기는 물론 돈, 권력, 지식, 언변 등의 도구도 절제해야 한다. 그래서, 머리가 멍청해질 대로 멍청해져서 무능과 유능, 유식과 무식, 성실과 나태, 미모와 추물, 기타 등등 도구를 사용한 머릿속의 흔적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때쯤이면 날개가 돋거나 최소한 천사를 본능적으로 알아보는 눈이 생기지 않을까? 주변에서 그냥 ‘아는 여자’라고 무심히 넘긴 게으른 여자, 못생긴 여자, 무식한 여자의 겨드랑이에 난 날개를 식별하는 눈이.

<아는 여자>의 남자주인공은 암에 걸린 쓸모없는 야구선수가 되어서야 천사를 발견한다. 다름 아닌 10년 동안 그냥 ‘아는 여자’였던 이웃집 여자가 그 주인공이다. 잘 나가던 야구선수로 명성을 갈구할 때, 더 높은 곳에 고정됐던 그의 시선은 눈 오는 저녁 자신의 창문 앞까지 강림한 천사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 천사는 상대가 알아주거나 말거나, 대상이 유명세를 타든 암환자가 되든, 주사가 있건 없건 개의치 않고 꿋꿋하게 사랑한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규정하는 못남과 남루함을 보는 눈이 아예 없다. 그건 그가 자족적 인간이기 때문에 굳이 못남과 남루함을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아는 여자’들 중에서도 그런 천사가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언제쯤 새대가리가 될 수 있을까.

남재일/ 고려대 강사 commat@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