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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속으로 지다, 재개봉 극장

그때 그시절 까까머리 문화해방구 지금은 서너곳뿐‥역사 뒤안길 퇴장

학교에 없던 것이 거기에 있었다. 스크린 맞은 편의 컴컴한 객석에 파묻혀 있는 동안 그곳은 해방구였다. 주입식 학습, 획일적 규율, 군사문화의 폭력을 피해 그곳으로 숨어들면 사랑과 모험과 영웅이 기다리고 있었다. 단속반에 걸릴까 숨 고르면서도 화면에 넋 놓고 빠져들던 까까머리, 단발머리 소년소녀들은 거기서 사랑과 꿈과 인생을 배웠다.

재개봉관! 개봉관에서 막 내린 영화를 뒤늦게 다시 틀던 그곳은 6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도시 변두리의 청소년들에게 세상을 향해 뚫린 창이었다. 시내 중심가의 개봉관은 입장료도 비쌌고 별도의 버스비까지 필요했다. 가난하던 그때 용돈이 궁하던 아이들은 문화 소비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다. 요즘처럼 인터넷도 없고, 대중문화에 대한 통제가 유달리 심했던 당시에 호기심 왕성한 사춘기 학생들의 발길은 변두리 재개봉관, (재개봉관에서 상영한 영화를 뒤이어 트는) 삼개봉관, 사개봉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고 갔다. 왜 재개봉관에선 중간에 상영이 중지돼 한참을 기다리는 일이 생기는지. 또 같은 영등포의 재개봉관인데도 이소룡 영화는 연흥극장에서만 하고, 튜니티 시리즈는 경원극장에서만 했는지. 그리곤 어른이 돼 돌아보니 그 재개봉관들이 눈에 보이질 않는다. 한때는 객석 1천개가 안 되는 낡은 극장에 하루 1만명 넘는 관객이 들고, 극장 수표 주임이 관할 경찰서 소년계 형사까지 갈아치웠다는 그 ‘힘 세던’ 재개봉관이 지금은 흔적을 찾기 힘들다. 언제부터 얼마나 줄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조차 없다.

70년대 초반 서울 시내에만 140여 개의 극장이 있었다. 그 중 개봉관은 10곳이 안 됐고 나머지 대부분인 130여 곳이 재개봉관, 삼개봉관, 사개봉관이었다. 지금은 멀티플렉스가 많아져 개봉관 50여 곳에 스크린수 300여 개인 데 반해 재개봉관은 극동극장, 바다극장, 이수시네마 등 서너 곳에 불과하다. 극동극장은 몇해전부터 간판 값이 나오질 않아 극장 입구에 포스터만 붙여놓고 영화를 튼다. 386세대의 후미대열을 끝으로 ‘시네마 천국’ 세대가 소리 없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그 시절 ‘시네마 천국’에선 어떤 일이‥

1980년대 중반 이전만 해도 한국 극장의 압도적 다수는 재개봉관 이하 삼개봉관, 사개봉관이었다. 그러나 이들 극장에 대한 자료는 드물다. 입장료 공시제도가 사라진 80년대 초반 이후엔 서울시극장협회나 영화진흥공사 모두 개봉관과 재개봉관을 구별해 기록하지 않아 재개봉관의 수치부터 파악이 안 된다. 재개봉관 이하 극장의 배급 시스템을 정리해 놓은 자료도 찾기 어렵다. 또 당시의 관객들이 영화산업, 그것도 개봉관에서 간판을 내린 뒤부터 시작하는 마이너 영화산업에 관심을 갖기도 힘들었을 터. 그 시절 ‘시네마 천국’의 이면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필름 복사본 달랑 13벌 화면엔 비가 주룩주룩

필름 프린트 한 벌로 세 극장이 동시에 상영

1970년을 전후해 정부는 영화 한편의 필름 프린트 수를 제한했다. 한국 영화, 외국 영화 모두 편당 13벌의 프린트로 전국의 극장을 돌려야 했다. 당시의 배급은 전국을 서울, 경기·강원, 충남북, 전남북·제주, 경북, 경남의 6개 권역으로 나눠 이뤄졌다. 각 권역이 2벌씩 가져가 개봉했고 개봉관 배급은 영화 제작·수입사가 직접 했다. 개봉관 상영이 끝나면 권역별로 배급업자가 영화 제작·수입사로부터 프린트를 1년 안팎의 기간에 돈 주고 빌린다. 그걸 재개봉관에 거는데 서울의 경우 두 벌로는 수요를 메우기 어렵다.

홍콩 영화 뜨자 프린트 수 제한

지역별로 필름 바꿔치기 상영

배달사고 나면 하염없는 기다림

영등포 지역 재개봉관에 한 벌, 서대문과 남대문을 묶어 한 벌, 종로와 청량리를 묶어 한 벌씩 세 벌을 마련하기 위해 통상 경기·강원 지역에서 한 벌을 빌려온다. 그러면 영등포의 재개봉관은 프린트 한 벌 가지고 여유있게 틀고 나머지 지역은 두 극장이 한 벌을 가지고 돌려 튼다. 프린트 한벌은 필름 천자짜리(10분 분량) 통으로 나뉘어 있어 한 극장이 1번 통을 틀 때, 다른 극장은 4번 통을 틀면서 상영이 끝난 통을 자전거에 싣고 재빨리 날랐다. 배달사고가 나면 어쩔 수 없다. 상영 중간에 쉬면서 기다리는 수밖에.

나아가 경기·강원지역에서 한 벌을 빌리지 못하거나 큰 흥행작일 경우엔 세 극장이 한 벌로 돌려틀었다. 이런 식으로 재개봉관이 끝나면 삼개봉관, 다시 4개봉관까지 간다. 그러니 프린트가 성할 리 없다. 13벌 중 남은 한 벌은 인기가 좋을 때 다시 개봉관에 걸기 위한, 영화사 별도 보관용이다. 60년대부터 배급업에 관여했던 김형종 롯데월드시네마 부사장은 “재개봉관이 필름 잘라서 틀었다고 하는데 오해다. 그거 한 컷 살리려고 테이프 붙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라고 말했다.

홍콩 영화를 제한하라, ‘프린트 쿼터(?)제’

▷ 서울에서 몇 곳 안 남은 재개봉관 중 하나인 사당동 이수시네마의 영사실 / 윤운식 기자

김 부사장 말로는 프린트 벌수를 제한한 건 60년대 후반 ‘외팔이’ 시리즈 등 홍콩 무협영화가 크게 히트하면서부터였다. 이전까지 흥행을 주도한 건 한국 영화였고, 프린트 제작비용 더 들일 필요 없이 10벌 안팎 선에서 앞의 방식으로 돌리면 적당한 흥행의 규모였다. 그런데 홍콩 영화가 대박이 터지면서 영화사들이 홍콩 영화의 프린트 수를 늘리려 하자 정부가 프린트 벌수를 제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부는 또 2~3년 동안 홍콩영화 수입 편수 자체를 1년에 1~3편으로 제한해 당시 허가돼 있던 20개 영화사들이 홍콩영화 수입 권리를 제비뽑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외팔이’ 시리즈 같은 화제작이 나올 때 관객들이 빨리 보고 싶어하는 건 당연했다. 재개봉관에 오기를 기다리는 관객을 줄이기 위해 개봉관들은 서울시극장협회 규정에 조항을 만들어 한 영화가 개봉관 상영이 끝난 뒤 2주가 지나야만 재개봉관에 걸 수 있도록 했다. 재개봉관으로선 속터지는 일이지만 개봉관의 힘이 센 탓에 어쩔 수가 없었다. 다만 해당 영화를 상영한 개봉관이 양해하면 2주가 지나지 않아도 재개봉관에서 틀 수 있다는 예외조항이 있었다. 로비가 극심했음을 미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70년대판 ‘아트 시네마’, 외국영화 전문 재상영관

몇몇 홍콩영화를 빼면 70년대 초반까지 재개봉관 이하 극장의 흥행을 주도한 건 한국영화였다. 외국 영화 중에서도 특히 서양 영화는 재개봉관 배급업자들이 잘 취급을 하지 않았다. 그 틈을 타고 외국 영화를 수입한 영화사와 직접 거래해 외국 영화만 재개봉하는 특수한 극장이 생겨났다. 서울 명동의 명동극장, 프라자호텔 뒤 경남극장은 70년대판 ‘아트시네마’였고 대학생들의 데이트 장소로 인기를 끌었다.

담배연기 동네광고 임검석‥

60~70년대에 재개봉 극장은 인근 지역에서 제일 큰 건물이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인기가 좋았던 ‘라이브 쇼’를 이 재개봉관에서 했다. 구봉서, 서영춘, 배삼룡씨 등 코미디언을 내세우고 가수 몇명과 짝지어 공연하는 이 쇼는 두 달에 한번 꼴로 재개봉관을 순회했다. 또 재개봉관이 주변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어서 동네 사진관, 갈비집, 예식장 등을 광고하기에도 좋았다. 재개봉관에서 영화를 시작하기 전 5분 동안 슬라이드와 가끔씩 필름으로 찍은, 조악하면서도 정겨운 동네 광고들을 만났던 경험은 지금 멀티플렉스에선 찾아볼 수 없다.

지금 극장에서 담배를 핀다는 건 객석은 물론 휴게실에서도 생각하기 어렵다. 당시의 재개봉관에도 스크린 양 옆에 ‘금연’과 ‘탈모’라는 표어판이 붙어있었다. 그러나 관객들은 객석에 앉아 그냥 피웠고 그때의 담배관념에서 이 흡연을 말리는 이도 없었다. 스크린 앞으로 스멀스멀 담배연기가 올라가는 광경은 지금 같으면 범죄의 현장이 됐을 것이다. 반면 지금 극장에서 모자쓰는 걸 뭐라고 하는 사람이나 표어는 없다. 스크린 옆에 부착돼 있던 게 하나 더 있다. 대형 시계. 바늘 시계든, 숫자 시계든 껌껌할 때도 볼 수 있게 조명을 했다. 70년대부터 경원극장을 운영했던 한 관계자에 따르면 이건 “당시만 해도 시계 없는 사람이 많았던” 데 따른 배려였다. 또 지정좌석제가 아닌 재개봉관은 입석관람이 허용됐다. 당국에서 객석 외의 공간 크기에 비례해 입석 가능 인원 수를 지정했다. 그 인원수가 평균해서 객석수의 10분의 1쯤 됐다.

▷ 서울 시내 한 극장의 간판 그리는 모습.

스크린으로부터 먼 뒷쪽 객석엔 ‘임검석’이라고 쓰여진 자리가 꼭 하나씩 있었다. 파출소 순경이 교대로 하루에 한번씩 이 자리에 와 임검부에 사인하고 갔다. 범죄자나, 미성년자관람불가 영화에 청소년이 보러오는 걸 감시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청소년에 대한 단속은 이 자리를 찾는 순경이 아니라 주로 경찰, 시청문화과, 학교 교사로 짜여진 합동단속반의 몫이었다. 이들은 세달에 한번 꼴로 극장을 찾았고 신고가 들어오면 더 빨리 왔다. 앞의 관계자에 따르면 막상 재개봉관 운영자를 속 썩이게 만든 건 교외지도 교사였다. “원래 제도는 교외지도 교사가 극장 반경 50m 밖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도록 하고 있었다. 이 교사들이 미성년자 관람가 영화임에도 수시로 극장 안에 들어와 학생들을 끌어낼 때면 속이 상했다.”

재개봉관 몰락사

1970년대 초 140여 곳에 이르던 서울의 극장수가 70년대 중반 70여 곳으로 줄었다. 세무 당국이 입장료의 30%를 입장세로 거둬간 탓에 이윤이 크게 남지 않았고, 부동산 붐이 일면서 건물주들이 극장을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77년에 세제가 바뀌어 입장료의 11분의 1을 부가세로 내기 시작하면서 극장업은 다시 활기를 띠는 듯했으나 80년대 초 프린트 벌수 제한이 풀리고 객석 100석 안팎의 소극장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소극장에 밀려 기존 재개봉관의 입지가 줄어든 것이다. 곧 이어 할리우드 영화 직배가 허용됐고, 관객은 할리우드 영화를 찾아 개봉관으로 향했다. 비디오 보급의 확대는 재개봉관에 찾아갈 필요성을 반감시켜 90년대초 소극장들을 문닫게 만들었다. 배급도 시들해져 마지막까지 서울에서 재개봉 배급을 해온 서울영화배급도 경기·강원 지역으로 옮겨갔다.

소극장에 밀리다 비디오에 결정타

80년대 중반부터 재개봉관들은 개봉관으로 하나둘씩 전환했고, 멀티플렉스 바람이 불자 기존 극장을 쪼개고 옆 건물을 임대하면서 스크린 수를 늘렸으나 경영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개봉관으로 옮겨간 동일, 대지, 성남, 새서울극장이 7년 전부터 지난해까지 잇따라 문을 닫았다. 삼개봉관이었다가 재개봉관을 거쳐 개봉관으로 ‘승격’한 녹번동 도원극장은 상암시지브이가 들어서면서, 80년대 중반 개봉관이 된 경원극장은 영등포 롯데시네마의 개관을 코앞에 두고서 깊은 한숨을 쉬고 있다.

홍기선 감독 특별 기고, 서극 <촉산>‥삼류극장의 재발견

고화질 대형 화면과 온 신경을 뒤흔드는 멀티 채널의 사운드, 최첨단을 자랑하는 요즘 극장에서 영화 감독들은 자신의 의도가 관객들에게 올바로 전달되는 것에 만족하며 좀더 좋은 화면과 사운드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자신의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가운데 스크린이나 사운드 상태가 떨어지는 곳에 가면 내 작품이 여기저기 찢겨져 상영되는 것 같은 조바심을 갖게 된다. 그러다가도 한편으로 내가 자라오면서 주로 경험한 극장들, 지금의 나를 있게 했던 극장들이 칙칙한 화면과 찢어지는 듯한 사운드, 낙후된 시설의 삼류 재개봉관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자조의 웃음이 나온다.

나는 6~7살 때 시골 초등학교 운동장의 야외상영으로 처음 영화를 봤다. 개봉관, 재개봉관, 삼개봉관, 동시상영관 거쳐 트는 유랑극장인 셈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재수할 때 아르바이트하고 남산 시립도서관 가서 책 읽는 것 빼고 친구 하나 없는 내가 시간을 보낼 곳이 없었다. 그러다 발견한 곳이 파고다극장이었다. 파고다극장은 한 번 표를 사고 들어가면 종일 있어도 되는 동시상영관이었다. 하루종일 자다 깨며 코고는 사람, 상영 도중 영화가 끊기면 휘파람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필름이 낡아 화면은 빗물이 하얗게 내리는 것 같아 영사기 돌아가는 소음과 함께 마치 빗속에서 영화가 틀어지는 것 같은 착각을 주는 …. 이런 환경의 극장에서 사춘기 시절 나를 영화의 세계로 끌어당긴 영화들을 만나게 됐다. 〈젊은이의 양지〉 〈미망인〉 〈내일을 향해 쏴라〉 등등 ….

당시 내가 몇번씩 보며 빠져들었던 영화들을 생각해보면 대개가 해피엔딩이 아닌 주인공이 마지막에 죽는 영화들이었던 것 같다. 동시상영하는 음침한 삼류극장의 비 내리는 스크린 앞에서 재수도 아닌 재수를 하며 내일의 희망을 잃어버린 16살 사춘기 소년이 마지막에 주인공이 죽는 비극적인 영화에 빠져 있는 모습이라니 ….

대학 졸업 뒤 서울영화집단에 있던 1983년께 장선우 선배가 재미있는 영화가 있으니 보러가자고 해 청계천 7가쯤에 있는 청계극장에 갔다. 1천석이 넘는 동시상영관이었는데도 자리가 거의 꽉 찼다. 그때 본 영화가 〈촉산〉이었다. 허공을 나는 기술이나 화면의 분위기가 이전의 홍콩 무협영화와는 완전히 달랐다. 아마 개봉관에서는 각광을 받지 못하고 영화인들에게도 눈길을 끌지 못했지만 재개봉관을 전전하면서 관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궁금증에 미국문화원까지 가 자료를 찾아본 결과 감독 쉬커(서극)가 겨우 32살의 신진이고, 조지 루커스의 〈스타워스〉 특수효과를 맡은 기술팀과 함께 작업한 것을 알게 되었다. 쉬커 감독의 등장과 〈촉산〉은 이후 10년여의 홍콩영화의 르네상스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몇 해 뒤 개봉한 쉬커의 〈천녀유혼〉 또한 개봉관에서는 짧게 끝났지만 재개봉관 상영을 거치면서 소문이 나 많은 젊은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그때 재개봉관은 영화를 재발견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홍기선/〈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선택〉 감독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