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TV를 보다
언니들 파이팅!

<제28회 아테네올림픽> 한국 여자배구 경기

3S 정책은 5공화국 시절 ‘존재했었다’고 믿어지는 국가시책이다. 당시 민주화세력은 전두환 정권이 섹스(Sex),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를 통해서 국민을 탈정치화해 우민으로 만든다고 비판했다. 나는 당시 양식있는 다른 시민들처럼 그 비판을 당연한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돌이켜보니 생각이 짧았다. 3S 정책은 아주 진보적인 정책이었다. 단군 이래로 이토록 쾌락적인 정책이 또 있었던가! S로 시작하는 좋은 말은 다 들어 있고, 3S만 있어도 인생에 모자람이 없을 지경이다.

다행히 몸 따로, 마음 따로였다. 내 몸은 3S 정책의 훌륭함을 느끼고 있었던 게다. 내 마음의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몸은 어릴 때부터 스포츠 중계에 미쳐 살았다. 물론 영화도 좋아했고, 섹스도 동경했다. 유신이 선포되던 해에 태어나고, 세계 어린이의 해에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88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고딩이 된 나는 기꺼이 3S 정책의 ‘즐거운’ 희생양이 되었다. LA에서 시작된 나의 올림픽 여정은 서울을 거쳐 바르셀로나로 갔다가 시드니에서 아테네로 귀환했다. 또다시 4년마다 열리는 축제의 계절이 돌아왔다. 그렇다. 나는 올림픽 키드다.

이번 올림픽에서 나의 관심사는 단연 ‘언니들의 마지막 투혼’이다. 그 언니들은 88올림픽 때 중고딩이었고, 그 언니의 언니오빠들이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보면서 운동을 시작한 세대다. 그 언니들이 어느새 나이 삼십줄에 접어들었다(내 또래다). 예컨대 여자배구에는 구민정, 최광희, 장소연, 강혜미가 있다. 핸드볼에는 오성옥, 이상은 언니 등이 있다. 그리고 여자하키 등에 당장 기억나지 않는 이름들도 있다. 올림픽 금메달이 지상과제인 한국 스포츠 풍토에서 ‘조로’는 하나의 전통이다. 더구나 여자선수가 30대까지 선수생활을 하는 일은 지극히 이례적이다. 그 언니의 언니들은 올림픽을 겨냥해 바짝 운동했고, 금메달을 따고 바로 은퇴했다. 연금수혜자의 행복을 누리면 그만이었다. 언니들은 구습을 깨는 개척자들이다. 그 언니들이 ‘노구’를 이끌고 뒹구는 모습을 보면 코끝이 찡해진다. 꼭 메달을 딴다는 보장도 없다. 한국 여자배구가 메달권에 들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낮고, 여자핸드볼도 쉽지만은 않다. 이런 경우 ‘부상’을 핑계로 대표팀을 마다하는 것이 전통이다. 하지만 언니들은 뛴다.

언니들이 오래 뛸 수밖에 없는 조건도 있다. 세대교체가 안 됐기 때문이다. 그놈의 IMF 탓이다. 언니들은 한창때인 20대 중·후반에 경제위기의 한파를 맞았다. 재벌들의 ‘선심’으로 유지되던 스포츠계에는 더 심한 한파가 몰아쳤다. 오빠부대가 없어 광고효과도 없는 여자팀은 우선 정리해고 대상이었다. 잘 나가던 팀이 해체되면서 세계 정상권의 선수들이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 비인기 종목일수록 한파는 오래갔다. 심지어 지난해 여자핸드볼팀이 세계선수권대회 4강의 ‘위업’을 달성하던 순간에도 대표팀 선수들은 소속팀이 해체됐다는 ‘비보’를 들어야 했다.

운이 좋으면 팀을 옮겨 선수생명을 연명했다. 언니들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언니들은 살아남았지만 후배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선수를 키울 여유가 없는 팀은 이미 큰 언니들을 혹사했다. 언니들은 소속팀에서도 국가대표에서도 주전 역할을 계속해야 했다. 이제 국가대표는 그만하고 싶지만 언니들에게는 은퇴할 자유도 없었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노구를 이끌고 올림픽 예선에 나갔고, 노구를 일으켜 출전권을 따냈다. 한국 여자배구팀이 올림픽 첫 경기에서 이탈리아에 3 대 0으로 진 뒤, 다음 경기에서 그리스를 3 대 1로 이겼을 때, 내 어찌 기쁘지 않았겠는가.

언니들은 돈가뭄에 시달렸지만 돈줄이 든든한 종목도 있다. 유도와 레슬링이 메달박스의 위치를 굳건히 유지하는 것도 ‘돈줄’의 힘이다. 경마장의 판돈으로 한국 유도는 세계 정상권을 유지하고, 삼성생명의 보험료로 레슬링 금메달을 캐내고 있다. 한국유도 영웅은 대부분 마사회 소속이고, 레슬링 금메달리스트는 십중팔구 삼성생명 소속이다. 그 옛날 3S 정책을 펴던 정부는 ‘한 회장님 한 종목 갖기 운동’을 벌였다. 탁구는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 하키는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 뭐 이런 식이었다. 회장님들이 몰락하자 그 종목도 기울었다. 유도와 레슬링은 몰락하지 않는 회장님을 모시거나 마르지 않는 화수분을 가진 운 좋은 종목이다. 돈이 성적마저 좌우하는 세상에서, ‘돈 안 되는’ 국가대표 경기에 ‘몸 버려가면서’ 뛰는 언니들이 있으니, 칭송받아 마땅하지 않겠는가? 언니들 파이팅!

추신. 아나운서, 해설자 여러분. 대놓고 중국 욕하고, 은근히 일본 뒷다마 까는 일 그만합시다. 특히 유도경기 중계 도중 나온 ‘망언’은 심했습니다. 어떤 해설자는 같이 중계하던 아나운서가 계순희 선수의 다리공격 기술을 칭찬하면서 “중국 선수들 다리공격도 좋더군요”라고 말하자 “중국 선수들의 다리기술은 좀 지저분하죠”라고 대꾸했습니다. 어떤 아나운서는 유도 경기 셋쨋날 이원희 선수가 첫 금메달을 따자 “이틀 동안 일본 선수들에 억눌렸던 감정도 털어버릴 수 있게 됐다”고 소리쳤습니다. “억눌렸다”니, 지금이 일제시대입니까?

신윤동욱/ <한겨레21> 기자 syuk@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