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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웃음, ‘루비치 터치’를 만난다
김용언 2004-11-05

서울아트시네마, 11월6일부터 코미디의 제왕 에른스트 루비치 회고전 열어

에른스트 루비치에 관한 유명한 일화 하나. 1947년 심장병으로 사망한 그의 장례식에 참여했던 이들 중에는 윌리엄 와일러와 빌리 와일더도 있었다. “더이상 루비치를 볼 수 없다니…” 하고 비탄에 잠긴 빌리 와일더가 중얼거리자 윌리엄 와일러가 덧붙였다. “더 나쁜 건 더이상 루비치의 영화를 볼 수 없다는 거야.” 아마도 그의 영화를 보기 위해선 천국에까지 가야만 하는 걸까? 그의 영화 제목대로, 천국은 그때까지 기다려줄까? 하지만 행복하게도 이 지상에서 다시 한번 그의 작품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오는 11월6일(토)부터 14일(일)까지 열리는 에른스트 루비치 회고전이 바로 그것이다.

재단사의 아들이 할리우드 코미디 감독이 되기까지

1892년 부유한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난 에른스트 루비치는 가업을 물려주려는 아버지의 희망을 거부하고 연기자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16살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낮에는 아버지의 가게에서 장부 일을 보았고 밤에는 카바레와 뮤직홀, 극장을 드나드는 이중생활을 거듭하던 끝에 19살 때 당시 ‘무대의 마술사’로 불렸던 위대한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에게 발탁되어 도이치 시어터에서 연기를 시작했다. 독특한 코미디 감각 덕분에 금세 주연급으로 상승한 루비치는 잠시 아르바이트 삼아 일하던 영화 스튜디오에서 비로소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때부터 연기뿐 아니라 각본과 연출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진짜 왕자’와 결혼하기 위한 대소동을 캐리커처화된 코미디 감각으로 그려낸 <굴공주>(1919)로 인기를 모으기 시작, <마담 뒤바리>(1919)와 <거짓>(1920)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뒤 그의 영화에 반한 할리우드 스타 메리 픽포드의 초청으로 미국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유럽에서 건너온 이방인의 순진함을 가장한 유쾌한 뻔뻔함으로 삼엄한 검열의 눈길을 교묘하게 피하면서 섹슈얼한 전복을 다루는 걸작들을 연이어 내놓으며 평론가와 관객 양쪽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러브 퍼레이드>나 <몬테 카를로> <미소짓는 중위> <메리 위도우> 등의 뮤지컬뿐 아니라 로맨틱코미디의 걸작 <삶의 설계>와 <낙원에서의 곤경>, <니노치카>는 루비치에게 코미디의 제왕으로서의 위치를 탄탄하게 만들어주었다(무성영화의 여신 그레타 가르보를 고지식한 소련 특사로 캐스팅한 <니노치카>의 광고문구는 “뉴 가르보-가르보가 웃는다!”였다).

지난 2월 서울 시네마테크 주관으로 개최되었던 ‘할리우드 코미디 클래식’ 상영작 중 관객의 가장 큰 박수갈채와 박장대소를 이끌어내었던 작품은 다름 아닌 루비치의 <낙원에서의 곤경>과 <사느냐 죽느냐>였다. 아마 이때 에른스트 루비치의 영화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20년대에서 40년대에 이르는 그 보수적인 시절 동안, 섹스와 돈에 대한 노골적인 탐구를 이토록 아무렇지 않은 듯 세련되고 현대적인 매너로 그려낸 솜씨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어라 꼬집어서 말할 순 없지만 여타의 상영작들에 비해 억지로 웃기려 하지 않으면서도 그 여유만만함으로부터 무방비의 폭소를 이끌어내는 탁월한 능력 말이다. 당신도 그 점을 느꼈다면 역시나 ‘루비치 터치’(Lubitsch Touch)의 포로가 된 것이다. 잠깐, 루비치 터치가 뭐냐고? 루비치식의 교활할 정도로 매끈한 유머감각, 동시대의 점잔 빼는 관습을 조롱하며 섹슈얼리티라는 위험한 테마를 정교하게 다루는 방식(레오나드 말틴), 혹은 미묘하게 스타일리시하며 위트있고 대담하게 섹슈얼하다는 의미를 압축할 수 있는 단어(<시카고 트리뷴>), 아이디어와 상황을 하나의 숏이나 짧은 장면 속에 알뜰하게 압축시킴으로써 영화 전체의 의미와 캐릭터들에 관한 아이러니한 단서를 제공하는 위트(에프라임 카츠), 가장 즐거운 순간에도 치명적인 슬픔이 대위법을 이루는 방식(앤드루 새리스)… 기타 등등. 수많은 감독들이 그토록 따라하고 싶어했고 수많은 평론가들이 정체를 정확하게 묘사하려 애썼지만 그 언저리만을 맴돌 뿐 끝까지 묘사 불가능한 것으로 남았던, 에른스트 루비치만의 이런 스타일이야말로 그의 영화가 ‘천국의 웃음’을 만끽하게 해주는 드문 매체로 남게 했던 가장 귀한 보물이다.

김용언/ 영화평론가 mayham@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