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커버스타
느리고 조용하게, 그러나 멋지게!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소지섭

‘미사 폐인’을 낳은 (이하 )는 감정증폭기 같은 드라마다. 사랑이 남긴 상처들로 만신창이가 됐어도 또 다른 사랑을 붙들고 싶은 무혁(소지섭), 남을 배려하고 주위에 마음쓰느라 자기 사랑도 제대로 챙길 줄 모르는 은채(임수정), 사랑이 사랑인 줄 몰랐던 순수한 철부지이자 톱가수 최윤(정경호), 사랑을 불신하지만 사랑의 순간은 알고 있는 민주(서지영). 그리고 아들에 대한 절대적인 모성애보다 인간적인 나약함이 앞서는 여배우 오들희(이혜영). 다른 드라마들과 마찬가지로 부모자식이 있고, 빈부 차이가 있고, 특별한 부류와 평범한 부류가 나뉘어 있지만 거기엔 대부분의 드라마들이 관습처럼 끌어들이는 피상적인 계급 관계나 억지스런 선악구도가 없다. 그 때문에 사랑과 증오, 복수라는 익숙한 테마도 살아 있는 감정 그 자체로 존재한다. 자기가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안 아들이 친엄마에게 복수하려고 한다라는 애초의 설정만 빼고 나면 는 상황의 확장보다 상황이 남긴 감정의 여파에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굴곡진 사건의 플롯이 아니라 요동치는 감정의 플롯을 짜나가는 드라마다.

이 감정증폭기에서 소지섭이 터져나왔다. 머릿속 숨골 부근에 총알이 박혀 있어 근미래의 죽음을 선고받은 차무혁은, 그 총알이 혈관을 누르는 탓에 때때로 몹시 난폭해져도 본래 따뜻하고 순한 사람이다. “누구라도 탐났을 것”이라는 무혁의 캐릭터에 겹쳐진 소지섭은 그의 타고난 이미지만 갖고도 별 아쉬운 여백을 남기지 않는다. 고분고분하게만은 생기지 않은 표정의 그늘, 까끌까끌한데 순하게 들리는 작은 목소리, 활짝 웃어도 아래로 처지는 우울한 입꼬리. 이런 인상은 소지섭이 이제껏 맡아온 캐릭터들 가운데 의 차무혁과 가장 잘 어울린다. 스물아홉의 나이, 데뷔 10년이 쌓은 연기력 덕분에 둘 사이의 궁합은 안정감도 얻었다.

“는 시작할 때 주위에서 주는 부담이 컸어요. PD님도 그렇고 작가님도 그렇고 니가 잘해야 드라마가 산다, 계속 그러셨거든요. 같은 경우는 지원이도 있고 인성이도 있으니까 부담을 1/3로 쪼갤 수가 있잖아요. 근데 이건 임수정씨도 드라마 처음이지, 경호는 신인이지, 서지영씨도 그렇고. 부담의 화살이 나한테 많이 오더라고요.” 어느 누가 무엇을 선택할 때도 다 그렇겠지만 그 역시 가 이 정도까지 반응을 얻을 거라 생각하고 고른 것은 아니라 했다. “설정이 좋았어요. 머리에 총맞고 살아가는 거잖아요. 무엇보다 ‘기업드라마’가 아니고. 무슨 M&A 나오고 하는. 그런 거 진짜 싫거든요.” 그는 요점 분명한 대답을 빠르고 짤막하게 내놓았다.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저벅저벅 스튜디오에 들어설 것 같았던 소지섭은 발소리도 내지 않고 슥 다가와 서글하게 인사를 건네는 온순한 사람이면서, 잡다한 설명을 좋아하지 않는 단순하고 굵은 기질도 가졌다. 에서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는 칭찬도 “현장이 편해져서 그랬을 거예요” 정도로 얘기하고 넘어갔다. 영화 (2002) 한편을 빼면 줄곧 드라마만 해온 그는 대부분의 배우들이 못견뎌하는 드라마 촬영현장의 타이트한 시스템이 몸에 익숙하다고 했다. “영화는 조명 하나 세팅하는 데도 두세 시간씩 걸리잖아요. 촬영 들어가기도 전에 진이 빠져요. 드라마는 10분이면 하거든요. 그러니까 연기도 기교로 하는 거죠. 감정을 잡는 건 그 다음에 몸이 따라주는 거고. 옛날엔 힘들었는데 이젠 완전히 적응한 거 같아요.”

사실 그는 서른살이 지나고 나면 영화를 하려고 했다. 수식어없이 요점만으로 대답을 채우는 것처럼, 이왕 할 거라면 스크린도 꽉 채우는 게 그의 바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저는 영화에서 지금 젊은 배우들을 보면 화면이 꽉 차 보이는 느낌이 안 들더라고요. 왠지 비어 보이고. 그런 게 싫어서 저는 더 배우고 나서 하고 싶었어요. 때 죽는 줄 알았어요. (웃음) 민망해서. 거기 나온 내가 너무 부끄러워서.” 이후 드라마 시놉시스와 함께 영화 시나리오들이 밀려오고 있지만 선택하는 데 있어서는 드라마보다 영화의 부담이 몇 배 크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배우로서의 삶을 끝까지 지키고 싶어서가 아니다. 언젠가 그만두고 싶어서다.

2년 전 그가 첫 영화를 선택했던 배경에는 전 매니저와 관련된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모델을 하게 된 까닭은 그의 친구가 “나랑 같이 내보자”며 건네준 원서로 의류 브랜드 모델 공모에, 친구는 떨어지고, 덜컥 붙어서였다. 또 그전까지 10년간 수영을 했던 이유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몸 약한 아들에게 운동을 시키면 밥이라도 좀 잘 먹지 않을까 싶었던 엄마에게 등을 떠밀린 탓이었다. “근데 (대회에) 나가자마자 입상하는 바람에 그뒤로 쭉 하게 됐어요.” 지난 삶을 타의에 이끌려온 것 같은 사람에게도 최소한의 자기 의지와 노력과 결실이 있겠지만, 소지섭은 무의식중에라도 자신에게 공(功)이 될 수 있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의식적인 절제인지 타고난 겸손함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그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게 몹시 불편하다고 느끼는 사람이란 점이다.

인터뷰 녹음이 싫고, 사진 찍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한다. 사람들이 많은 곳을 꺼리고, 자주 연락하는 사람은 열댓명이 안 되고, 운동은 혼자 할 수 있는 종목이 좋다. “어떻게 지금까지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감독에게 술을 따르는 게 싫어 그만둘까도 했었고, 인터뷰에 대한 심한 거부감으로 기자와 싸우고 그냥 자리를 떠버린 적도 있었다는 건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아는 이야기다. 아마도 20년쯤 흐르고 나면, 소지섭은 라스베이거스에 근사한 호텔을 지어놓고 경영자로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제 진짜 꿈이에요. 다른 데서도 얘기한 거지만 저는 연기자를 평생 직업이라고 생각 안 해요. 그래서 인정받고 싶은 거 같아요. 그래야 떠날 수 있을 거 같아요. 아니면 피하는 거 같잖아요, 괜히. 잘 안 되니까 그만두는 거 같고. 이왕 떠나려면 멋있게 떠나야죠.”

의 무혁이가 비슷한 말을 했다. “내가 곧 죽는다는 건 알겠는데, 걸핏하면 코피 쏟고 아무 데서나 푹푹 쓰러지는 건 솔직히 너무 쪽팔려.” 손쓸 도리가 없다는 의사 앞에서 무혁이는 그렇게 소릴 질렀다. “그러니까 제발 코피 쏟고 쓰러지고 그런 것만 안 하게 해줘! 쪽팔리지 않고 끝까지 멋있게 보이다가 죽게 해달란 말야!”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촬영이 시작됐다. 소지섭의 몸은 움직임이 정말 느리고 작았다. 내성적인 성격이 한눈에 보일 만큼. 그러다 가끔씩 기다란 손가락을 뻗어 목을 살살 긁거나, 시력 나쁜 사람은 절대 못 알아볼 정도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사진 찍히는 게 싫다면서도 멋있게 찍히는 법은 잘 알고 있었다. 이왕 하는 일인데 청춘을 불살라 멋지게 해치우고 박수받으며 떠나기 위해서다. 젊은 날의 폼생폼사. 소지섭과 차무혁은 아무래도 많이 닮았다.

관련영화

관련인물

편집 권은주·디자인 문성일·의상협찬 폴 스미스, 론 커스텀, 허드슨 진, 송지오 옴므, 캉골(모자), 헬렌 카민스키(모자)·액세서리 협찬 루이뷔통(시계, 벨트), 미쉘 워치(시계), 타테오시안 런던(목걸이), 와키 앤 타키(신발)·스타일리스트 김효성, 김규희·헤어 장지숙(박은경 헤어살롱)·메이크업 조수정(박은경 헤어살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