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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효가 다한 소재와 진부한 방식,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오정연 2005-03-29

지극히 진부한 모습으로, 너무 늦게 도착한 자살의 초상.

자살은 삶에 대한 미련을 보여주는 증거일까 아니면 엄정한 선택의 결과물일까. 이에 대해 영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색다른 소재로 동시대의 욕망을 예민하게 포착했던 김영하의 동명원작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들려준다. 영화에 등장하는 세 인물, 한번도 자신의 모습을 영상에 담아본 적이 없는 행위예술가 마라(추상미), 사랑이 게임인 양 거짓 속에 진심을 담는 호스티스 세연(수아), 쿨한 죽음을 동경한 끝에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폭주족 커트(최성호)는 조금씩 다른 이유로 죽음을 곁눈질한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헐거운 연결고리로 작가이자 카운슬러이며 자살도우미인 S(정보석)가 등장한다.

아마도 감독은 원작의 아우라를 최대한 스크린에 옮기기 위해 고심했을 것이다. 마라와 세연은 소설 속 미미와 유디트와 거의 유사하고, 우연한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는 커트는 새롭게 추가된 캐릭터다. S가 베니스에서 만나는 홍콩 여자의 에피소드는 마라와 세연의 에피소드에 분배되면서 생략된 케이스. 문제는 과거와 현재, 공간과 화자까지 넘나들었던 소설의 진행방식을 그대로 차용한 점인데, 정교하게 영화적 화법을 계산하지 못한 탓에 사건의 시간순서는 혼미해지고, 인물의 욕망과 그 결과마저 오독될 지경에 이르렀다. 결정적인 아쉬움은 평범한 사람들의 은밀한 자살 욕구를 꿰뚫는 S의 위치.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정색한 채 들려주는 매력적인 관찰자 S는 지극히 소설적인 인물이다. 영화는 S의 캐릭터를 현실적으로 소화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절대적인 매력은 흔적도 없다. 형(장현성)과 함께 세연을 사이에 두고 갈등했던 택시운전사 동식(김영민)은 세연의 살해범으로 S를 지목하고 린치를 가하는데, 영문도 모른 채 폭력 앞에 속수무책인 S는 무기력한 방관자로 전락한다.

자살청부업자, 마라와 클림트, 에비앙 생수 등 대중문화의 첨단 아이콘을 효과적으로 끌어들였던 원작 이후 10년. 시효가 다한 소재와 명제는 한결 진부한 방식으로 스크린에 재현된다. 소설 속 인물들은 “이 시대에 신이 되는 두 가지 길, 창작과 살인” 사이에서 이루어진 선택의 이유와 결과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지만, 영화 속 그들은 철지난 불만을 늘어놓다가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생에 단 한번,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된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조차 능동적이지 못한 그들이 스스로를 동정하는 모습은, 아무래도 지루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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