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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기억, 시간의 삼위일체, <노스탤지어>와 <희생>
심영섭(평론가) 2005-03-30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와 <희생>

타르코프스키의 마지막 작품인 <희생>의 첫 장면은 죽은 나무에서 시작된다. 데뷔작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타르코프스키는 염소와 나비 사이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수직 트래킹으로 상승하면서 이반의 꿈속으로 살그머니 잠입했었다. <안드레이 루블로프>에서 역시 나무는 하늘과 땅을 이어준다. 아버지의 비법을 아는 척하던 소년은 이윽고 종이 완성되자 자신의 죄를 실토하고 진흙창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한다. 루블로프는 그런 그를 뒤에서 안아준다. 이때 카메라가 하강하면 비로소 관객은 알게 된다. 소년이 부여잡는 것은 죽은 나무이다. 타르코프스키에게 나무는 그냥 나무다. 제 힘으로 나무다. 그에게 자연주의란 영화 속에서 자연이 존재하는 형식이며, 영화란 자연 그 자체의 현존을 잡아내는 도구이다. 그리하여 그에게 나무란, 나무의 현존이란, 인간의 현존이며, 하늘과 땅, 이상과 현실, 러시아의 민중과 신, 무의식와 의식을 잇는 가교이다. 그 삼위일체를, 타르코프스키의 카메라는 수직과 수평의 트래킹으로 연결한다. 경계없이 매듭없이. <노스탤지어>와 <희생>은 바로 그 ‘나무’에서 시작된다.

<희생>, 타르코프스키가 인류에게 전하는 유서

<희생>

그리고 또다시 <희생>의 나무는 죽어 있다. 누가 이 나무를 되살릴 것인가? 3차대전이 발발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알렉산더는 마녀라고 추정되는 하녀 마리아와 동침하지 않으면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는 신의 전갈을 우편배달부에게 듣는다. <희생>은 상당 부분 잉마르 베리만의 실내극처럼 보이는 외관을 하고 있지만, 죽음과 부활에 대한 성서적 우화로 가득 차 있는 영화이다. 우편배달부는 일종의 신의 메신저로서 알렉산더에게 오래된 지도를 선물함으로써 인류의 역사 안에서 희생의 의미를 일깨워준다.

알렉산더는 선택해야 한다.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세계와 인류의 운명과 연관지을 수 있는가에 대한 선택. 그는 가장 비천한 인간이자,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기적과 직관의 세계에 사는 마리아와 결합해야만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죽음은 시간의 승리로 끝이 날 것이 분명할 터이지만, 타르코프스키의 주인공들은 그것을 예감하면서도 끊임없이 구원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자들이다. 죽은 나무에 물을 붓는 반복적인 행위, 텅 빈 온천장에서 꺼진 촛불을 다시 켜는 행위,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을 것 같은 우주로 몸을 던지는 행위. 그에게 구원이 특별한 까닭은 그것만이 타르코프스키의 주인공들이 전쟁터에서 우주에서 금지구역에서 집으로, 가족에게 도착할 수 있는 유일한 끈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구원의 여정을 향한 주인공의 시시포스적인 노력은 내면의 정신적 탯줄을 따라 집 주변으로 끊임없이 흐른다. <노스탤지어>의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우물가의 어머니가 있는 집. <거울> 속의 유년기의 집. 그리곤 <솔라리스>의 마지막, 아버지가 살고 있는 집.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그들에게는 기적의 증표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희생>의 주인공 알렉산더는 바로 그 ‘집’을 불태워버렸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알렉산더가 선택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폐암으로 죽어가면서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에게 남아 있던 단 하나의 것을, 기적의 꼬다리이며, 온 우주의 중심이자 온 존재의 증명서였던 자신의 집을 불태워버린다. 그 모든 것을 재로 돌리고, 한 그루의 죽은 나무에서 타르코프스키의 카메라는 하늘로 수직상승한다. 그는 이제 돌아갈 곳이 남아 있지 않다. <희생>은 타르코프스키가 인류에게 전하는 일종의 유서 같은 영화. <희생>을 뒤로하고 표표히 타르코프스키는 영화의 순교자가 된다.

타르코프스키에게 영화란 종합예술이라는 허울 좋은 미사여구가 아니라 움직이는 시간 그 자체였고, 나무와 바람과 돌과 짐승 같은 물질로 육화되어 드러나는 그 자체로 살아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는 그 시간과 공간을 잡아서 관객과 함께 체험하기를 바랐다. 자연에 영혼을 불어넣고 싶어했다. <희생>에서 알렉산더가 반복되어 경험하는 인류 종말의 예감이나 <안내자>에서 선보이는 비슷한 묵시록적인 정경들은 물속에 잠겨 있는 몇개의 동전과 총, 썩어가는 나뭇잎 등으로 손에 잡힐 듯이 표현된다. 그는 이러한 방식이야말로 현실에 숨겨져 있는 진리와 그 진리를 경험하는 관객과 그 진리를 재현하는 영화가 합일할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라고 보았다. 당연히 그의 영화는 느리고 오래된 하나의 컷 속에서 자신의 말대로 시간을 조각하는 작업과도 같다. 그러기에 타르코프스키의 시간을 영화 속에서 그대로 체험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타르코프스키가 단지 롱테이크의 작가로 기억된다면 그 또한 타르코프스키가 원하는 ‘봉인된 시간’의 미학을 크게 오해하는 일일 것이다. 타르코프스키가 추구했던 시간의 조각에는 공간에 대한 이해와 기억의 문제가 함께 뒤얽혀 있다. 그 기억과 그 공간은 그저 멀리 카메라를 두고 오래 찍는다고 해서 베껴낼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도 하다.

<노스탤지어>, 안도 밖도 없는 곳에 존재하는 시간의 리얼리티

<노스텔지아>

타르코프스키의 모든 시간의 조형물 속에는 기억의 수로를 따라 물이 흐른다. 물은 세계를 관통하는 등장인물의 주관적인 지각을 따라 끊임없이 의식을 파열시킨다. 한 예로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이반은 밥을 먹다 벽 전체를 울리는 물소리를 듣는다. 그 물소리는 이윽고 이반으로 하여금 깊은 기억의 우물과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또 다른 잠의 세계로 유년의 세계로 빠지게 만든다. 그 깊은 낭하의 우물에서 이반은 어머니와 함께 우물 속에 떠 있는 별을 잡는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도 잠시. 현실의 틈입인 전쟁의 총소리와 함께 우물의 ‘안’은 이반이 있던 ‘밖’이 되어버린다. 공간의 전치는 곧장 주인공의 기억 속에 가혹한 현실의 결이 침입하는 것으로, 이반의 무의식에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융합하는 것으로 끝장나버린다.

<안드레이 루블로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러시아인들이 고문당하고 타타르인의 노리개가 되는 참혹한 ‘밖’이라는 현실과 달리 종교라는 또 다른 권력의 비호로 둘러싸인 성당, 즉 안드레이가 일하는 ‘안’의 공간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영화는 바로 이 ‘안’의 지점에서 ‘밖’을 바라다보며 물어본다. 예술가의 임무란 과연 무엇인가? 예술은 이 참혹한 지옥과 어떤 연관을 맺어야 하는가? 루블로프는 점차 자신이 하고 있는 예술이 일종의 어용예술, 즉 최후의 심판처럼 사람들을 위협하고 권력의 발 아래 조아리게 만드는 또 다른 권력에 아부하는 ‘도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안드레이는 이를 거부하고 침묵 속에 빠져든다. 결국 타타르인의 침략으로, 러시아의 민중 공간인 ‘밖’은 성당이란 ‘안’을 침범하여 성당의 천장이 파열되어버린다. 그 ‘안’과 ‘밖’이 하나된 공간에서 루블로프는 천지간을 뒤덮는 눈을 맞이한다. 이윽고 안과 밖의 공간은 러시아의 역사와 민중이 하나 되는 장으로 확장된다.

<안드레이 루블로프> 이후 타르코프스키의 시간과 공간의 관계는 점점 더 복층화되어갔다. 초창기만 해도 안과 밖의 공간적 역전이 몽타주로 해결되지만 <노스탤지어>와 <희생>에서 그것은 완벽한 롱테이크와 딥포커스 미학 아래 매듭없이 진행된다. <노스탤지어>에서 주인공 고르차코프가 침대가에서 고향의 기억으로 되돌아갈 때, 자신을 사모하는 이탈리아 여자와 싸운 뒤 18세기의 노예이자 음악가인 바벨 소스노프스키의 편지가 낭독되면서 고르차코프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 어김없이 카메라는 트랙인으로 들어가 수평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다. 그 순간 이탈리아라는 ‘밖’의 공간에 있던 고르차코프는 자신의 집이 있는 러시아라는 ‘안’의 공간으로 들어서고, 관객은 타르코프스키의 심장이 노예의 신분으로 되돌아 가버릴지라도 귀향을 선택했던 18세기 예술가의 심장과 고통이란 음표로 함께 뛰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때 역사적 시간과 물리적 공간으로 나뉜 고르차코프와 소스노프스키와 타르코프스키의 경계가 모두 지워진다. <노스탤지어>의 마지막은 <안드레이 루블로프>에서처럼 안도 밖도 없는 곳이다. 허물어진 이탈리아 성당 안에 러시아의 집이 들어앉고 하늘이 뚫린 천장에선 하염없이 눈이 쏟아진다.

그렇기에 후기의 필모그래피로 갈수록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딥포커스가 영화미학의 핵심이 되고 그 공간에서 문과 창은 공간을 나누는 분기점이 아니라 공간을 늘리는 하나의 통로가 된다. <희생>에서 알렉산더의 집은 집이란 시각적 이미지가 중요하기보다 집 자체를 포함하는 하나의 공간, 앞과 뒤와 이층과 일층이 모두 연결되었다는 것이 중요해진다. 나무를 전경에 두고 정원에서 식사하는 알렉산더의 가족들과 그들을 피해 집 뒤에 숨어버린 알렉산더는 모두 한 공간 안에서 딥포커스로 찍혀 있다. 실내장면에서도 타르코프스키는 거울과 창문과 커튼 등의 장치를 이용하여 안이 밖으로 반사되고, 다시 밖이 안이 되는 깊숙한 복층의 공간으로 공간을 재배열한다. 이러한 공간은 결국 중층으로 이루어진 인물들의 내면 공간이자 인간관계의 공간이며, 망상, 꿈, 판타지와 소망 등이 뒤범벅되어져 실재의 세계가 실제의 세계를 함입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흑백과 세피아로 채색된 기억의 복도를 따라 끝간 데 없이 이어지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미학으로 인해 우리는 주인공이 느끼는 의식의 흐름의 마지막 하나까지 그대로 느끼며 ‘시간의 리얼리티’를 손에 잡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 그러니 온 인류를 위한 희생을 선택할 수 없더라도 이 심원한 영화감독의 영혼 앞에 옷깃을 여미라.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이 지구의 온 생명체들과 카메라와의 개기일식 과정이다. 밖의 역사와 안의 내면이 교감으로 연결되는 삼위일체의 아이콘화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우주는 순간순간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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