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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재료가 된 동서양의 만남, <그루지>

비디오판 <주온>, 극장판 <주온> <주온2>에 이은 시리즈. 왠지 돈 냄새가 조금 더 나지만 여전히 끔찍한 비명소리, 고양이 소리, 발자국 소리, 원귀의 소리.

진심으로 무서웠다. 긴 머리를 질질 끌고 기어서 천천히 스멀스멀 계단을 내려오던 여인의 한, 그리고 이어지는 죽음들. 평이한 장면에서조차 출처를 알 수 없는 기괴한 소리들로 심장을 터지게 만들었던 끔찍한 영화 <주온>. 할리우드가 공포영화 마니아들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이 영화에 손을 댔다. 동양의 이 그로테스크하고 무섭기 짝이 없는 귀신을 서양은 어떻게 받아들여 변주할 것인가. 현실로 귀환한 혼에 대해 동서양의 시선은 어떻게 교차할 것인가. 그러나 아쉽게도 <그루지>는 이러한 호기심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하다. <주온> 시리즈로 일약 혜성처럼 떠오른 시미즈 다카시가 여전히 이 미국판 <주온>의 감독이며 영화의 배경 역시 일본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루지>의 관심이 원작의 서사에서 시작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이 영화의 목적은, 혹은 제작자 샘 레이미의 야망은 원작이 뿜어내었던 강렬한 공포 그 자체를 확장시키는 데 있는 듯하다. 그래서 영화는 여전히 무섭지만, 관객을 두통에 시달리게 했던 원작의 서늘한 기운은 이어지지 않는다.

<그루지>의 줄거리는 대체로 극장판 <주온>에 충실하다. 인물의 시선, 몸짓에도 원작을 세밀하게 따르려는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미국판 리메이크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서양 관객은 이 영화의 무엇에 공포를 느낄 것인가. 이 질문이 <그루지>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등장인물별 독립된 에피소드로 옴니버스식 구조를 띠었던 원작은 시간과 이야기가 뒤죽박죽 섞여 그 흐름을 읽어내기 다소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각 이야기들은 자체로 하나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인 유기성 속에서 연결되어 이상한 혼란 속에서 공포를 배가시켰다. 명확하지 않음은 언제나 불안과 두려움을 양산하는 법이다. 자연히 영화는 한 인물이 전체를 이끌어가는 ‘주인공 영화’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루지>는 하나의 줄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중심인물은 단연코 카렌(사라 미셸 겔러). 영화는 줄곧 그녀의 행적, 그녀의 추리, 그녀의 공포를 따라간다. 말하자면, 공포의 베일은 카렌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감춰지고 가지를 뻗어나가 그녀의 공포로 시작했던 영화는 그녀의 공포로 끝을 맺는다.

무엇보다 <그루지>에서 주목할 것은 이 영화가 동서양의 만남을 공포의 재료로 이용하는 방식이다. 영화는 일본에 막 정착하기 시작한 서양인들을 원한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일본 전체를 공포의 근원으로 만들어버린다. 폐쇄된 공간 안에서 지속되고 있는 공포의 그림자와 이방인이 느끼는 낯섦에 대한 두려움은 중첩된다. 그리하여 영화 속 서양인들에게 공포의 저주는 한 집에서 시작하여 일본이라는 나라 전체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들의 두려움은 언제나 절반의 호기심을 내재한다. 호기심과 두려움의 공존. 그것은 서양의 동양에 대한 오래된 시선이다. 그 양가적인 감정 사이에서 공포의 긴장이 유발되고 있다. 원작에서 인물들의 몸에 죽은 영혼이 흡수되어 삶과 죽음의 경계를 흐리고 정체성의 문제가 언급되었던 것과 달리 카렌은 죽음의 그림자를 다만 바라볼 뿐이다. 그녀의 공포는 관찰자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는 동양의 원귀를 이방인의 시선으로 보는 관찰자이므로, 공포의 근원 또한 추적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녀의 이성은 저주의 시작이 밝혀지는 것과 공포가 귀환하는 것이 전혀 다른 문제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원작의 복잡한 짜임새보다는 일관된 흐름을 선택하는 영화는 내용상으로도 원작보다 단순한 길을 택한다. 여기저기서 사건이 출몰한다는 느낌을 주는 원작과 달리 <그루지>는 한 사건의 비밀을 캐나가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일본을 배경으로 일본 감독이 만들었다고는 해도 할리우드 자본에 기댄 영화이니만큼 스펙터클의 변모에도 눈길이 간다. 예컨대 카렌이 처음 접하는 죽음의 검은 그림자도 그 규모와 화려함은 <주온>에 비해 훨씬 자극적이고 거대하게 펼쳐진다. 또한 시미즈 다카시의 주특기인 갖가지 미묘한 공포의 울림소리들이 한층 더 겹겹으로 웅장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죽음과 원귀에 대한 고찰보다는 외관의 공포가 선사하는 충격에만 공을 들인 나머지 영화는 설명되지 않는 공포의 현상들을 단순히 일본의 관습과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구도로 메워나간다. 그 결과 서사는 힘을 잃고 오감을 경직시키는 잔인함만이 끈적거린다. 마치 놀이동산의 귀신의 집에 들어가 아무런 맥락없이 갑자기 눈앞에 떨어지는 갖가지 귀신들에 기절할 것 같은 느낌처럼.

비디오판 <주온>의 세밀함과 공포의 강도를 극장판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듯, <그루지> 또한 전작의 충격을 넘어서지는 못한 듯하다. <주온> 극장판을 이해하기 위해 비디오판의 도움을 얻어야 했던 것과 같은 수고를 들일 필요없이 <그루지>의 내용은 그 자체로 명확하게 풀려 있다. 이에 따라 해독불능에서 오는 심리적 공포는 준 셈이다. <주온> 시리즈에 이어, 리메이크판까지 스토리는 점점 평이해지고 원귀의 갑작스러운 출몰도 이젠 매너리즘에 빠질 때가 되었고 공포의 세심한 결 또한 자극적인 그림 속에서 사라지려한다. 그러나 폐쇄된 빈 공간과 실체없는 소리만으로도 머리카락을 쥐었다 놓았다 하는 시미즈 다카시의 예민한 말초신경만은 아직 건재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할리우드로 간 <주온>, <그루지>

서양인과 동양 원귀의 무시무시한 조우

<주온>

샘 레이미 감독

일본 공포물에 대한 할리우드의 부쩍 늘어난 관심을 반영하듯, <링>에 이어 할리우드로 간 <주온>. 미국판 <링>의 제작 총지휘자였던 로이 리는 또 한번 일본의 공포물을 할리우드에 소개하는 데 앞장선다. 그의 추천으로 <주온>을 보게 된 샘 레이미는 주저없이 자신이 세운 ‘고스트 하우스 픽처스’의 첫 번째 작품으로 <주온>의 리메이크 제작을 결정하게 된다. <스파이더 맨> 시리즈로 잘 알려진 샘 레이미는 이미 B급 호러물 <이블데드>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바 있다. 그는 원작의 공포를 그대로 살리기 위해 시미즈 다카시를 불러들이고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를 통해 영화에 데뷔한 사라 미셸 겔러를 캐스팅, 동양적 정서를 극대화한다는 취지로 일본에서의 촬영을 감행한다. 2004년 미국 개봉당시 2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그루지>는 그 위력에 힘입어 2편과 3편의 제작까지 확정된 상태라고 한다. 서양인과 동양 원귀와의 만남으로 리메이크판의 구도를 잡은 기획 의도는 이국적 낯섦에서 비롯되는 독특한 공포를 생산하며 매너리즘에 빠진 서구적 공포 속에서 뚜렷한 정체성을 확보한 셈이다. 샘 레이미는 개봉 당시 시미즈 다카시에게 공포의 수위를 낮추기 위해 5분 분량의 영상을 삭제해줄 것을 요청한 바 있다. 샘 레이미가 미국 관객은 결코 견뎌낼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영상이라고 거듭 밝혔던 바로 그 부분들이 국내에서는 복원되어 상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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