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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호 [43] - 아, 끔직한 대작영화여, <어우동>
2000-02-15

<어우동> 주연을 정하고, 청산리전투를 찍기 시작하다

<어우동>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만큼 김원두 사장의 간섭 또한 지나쳤다. 각색에서 특히 심했는데 많이 다투기도 했지만 우선은 그가 원하는 대로 끌려갔다. 그 대신 나는 과거의 사극과 달리 근래에 들어와 복식사 연구가 활발해진 만큼 소도구와 의상에 대해선 새로운 고증을 하고 싶었다. 전통복식 연구가인 석주선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단국대학교 석주선 박물관엔 아주 예쁜 기생전모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아직까지 사극에서 기생전모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어서 빨리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나는 기생전모가 깜찍하게 어울리는 신인을 찾아 <어우동>의 역할을 맡기고 싶었다. 여러 차례의 카메라 테스트를 하던 중, 어느 날 여배우 김보연에게서 한복이 아주 잘 어울리는 후배가 있으니 한번 만나보라는 전갈이 왔다. 탤런트 조진원이라고 했고 본명은 조영숙이었다. 그녀를 만나던 날 우연히 쌍무지개가 뜨는 것을 보았다. 강북강변대로 위에서였다. 나는 말만 들었던 쌍무지개를 처음 보았고 조영숙도 마찬가지였다. 어쩐지 축복의 징조란 느낌이 들었다. 카메라 테스트 결과도 아주 좋아서 보물 같은 신인을 만났다는 생각에 나는 내 성을 따와 이보희라고 예명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현진영화사의 <어우동>은 양평에서 예고편을 겸한 크랭크인을 마지막으로 다시 이어지지 못했다. 김원두 사장은 무엇 때문인지 제작을 미루었다. 아마도 자기가 원한 여배우가 아니어서 그러지 않았나 싶었다.

깊은 상심에 빠진 나는 연출부와 함께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여행을 떠나 술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김원두 사장으로부터 급히 올라오라는 전갈이 왔다. 혹시나 해서 올라온 나에게 그는 엉뚱하게도 만주 독립군의 청산리 무장항일전투를 먼저 영화로 만들자고 제의했다. 그 다음에 <어우동>을 만들자고 달랬다. 당시 문화공보부 차관으로 있던 허문도씨가 이 기획에 관심이 많으므로 여러 가지 지원이 가능하다는 얘기를 곁들였다. 처음엔 언잖았지만 대작에 야심이 많았던 터라 나는 허문도 운운의 얘기가 귀에 솔깃해 못 이기는 척 수락했다. 과연 허문도씨를 만나자 수만명의 엑스트라와 군마, 그리고 촬영장소 등, 거국적인 지원을 선선히 약속했다. 그 자리에서 그의 제의로 북한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도 함께 보았다. 처음 기획은 그야말로 아주 순조로웠다. 가수 조용필에게 주제가를 부르게 하는 것이라든지 가곡 선구자를 주제가로 하는 아이디어까지도 아마 다 허문도씨의 것이 아니었나 기억된다. 그러나 실제에선 모든 일이 그렇게 쉽지 않았다. 역시 돈이 많이 드는 일이었고 제작자에게 점점 큰 부담이 되었다. 또 시나리오를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백결씨를 비롯해 여러 사람이 애를 썼지만 청산리전투를 보는 시각은 역시 상투적이거나 영웅적이었다. 결코 남과 달라야 한다는 나의 선천성 귀재병엔 만족스럽지 않았다. 나는 또다시 촬영현장에서 시나리오를 완성한다는 악성의 비상수단을 택했고 실제의 역사적 인물과 픽션의 인물을 안배해서 기성과 신인의 캐스팅을 운용하고 내심 한명의 영웅보다 이름 없는 병사들의 감추어진 희생을 밑그림으로 만들기로 작정했다. 또 신인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어우동>의 타이틀 롤을 맡았다가 갑자기 추락하여 불운을 맛보게 된 이보희에게도 적당한 역을 맡겨 제작자의 눈에 드러나지 않게 역할을 키울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가소롭기 짝이 없는 만용이다. 완벽한 시나리오를 갖고서도 대작을 만들기 어려운 한국의 여건 속에서 그처럼 만용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은 차라리 넋나간 아마추어 아니고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결국 나는 2천명의 현역 장병을 엑스트라로 사용해 겨울날 하루에 촬영할 수 있는 작업량이 기껏 두세컷 정도라는 사실에 절망을 느끼고 말았다. 아침 일찍 집합한 엑스트라들을 점검하고 일본군과 독립군으로 나누어 의상과 소도구를 지급하고 제대로 모습을 갖추는 것만으로도 서너 시간이 쉽게 흘러가고 촬영장소로 이동하여 겨우 한숏을 위한 연습과 수정, 그리고 촬영에 들어가 OK는커녕 NG만으로 이미 점심시간이 지난다. 어쩔 수 없이 점심을 먹이고, 숲 속으로 산 속으로 개울로 흩어진 장병들을 다시 불러모아 수습하고 점검하고 다시 촬영에 들어가려면 벌써 겨울의 짧은 해는 빛을 잃고 앞서 촬영한 숏과 엄청난 차이를 느끼게 만든다. 게다가 소도구로 준비한 대포나 마차 등, 소도구 장비들이 엉터리로 제작되어 현장에서 망가지거나 작동이 안 되면 정말 울고 싶다. 사람이 미워 짓밟아 죽이고 싶다. 해는 지고 내일이 와도 마찬가지라는 절망은 나를 미치광이로 만든다. 결국 체념 끝에 내가 깨달은 것은 대작을 만드는 것은 연출자가 아니고 시스템과 인내심과 그리고 엄청난 돈이라는 것이었다. 내 주변엔 그 어느 것도 갖추어 있지 않았다. 경솔한 제작에 경박한 연출뿐이었다. 그제야 신필림 생각이 간절했다. 조수 시절 몸담았던 신필림은 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거대한 의상 창고와 소도구 창고, 전문 관리인, 그리고 수많은 조감독들과 스탭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이 신상옥 감독 한 사람의 연출을 위해 언제나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자격 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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