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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너무나 슬퍼서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
2000-01-25

끔찍한 일이다, 내 인생의 영화라니. 거창하게 내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영화 목록을 따로 간직하고 있지 못한 사람으로서 곤혹스런 일이다. 사실 나는 각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거나 나름의 시선에 따라 특정 영화에 무한한 애정과 지지를 표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다. 남들 4년 다니는 대학(연극영화과)을 무려 ‘10년’이나 다녔고,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영화일을 시작한 지 8년 가까이 됐지만 가슴 속에 따로 고이 담아둔 영화 몇편이 없다는 것이 창피하다는 생각도 든다.

영화제작소 청년이나 예술실험영화전용관을 운영했던 동숭아트센터에서 일했던 이력 때문에 종종 예술영화를 각별히 좋아하는 사람으로 오해 받는다. 하지만 나는 잘 만든 상업 영화를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사랑 영화를 좋아하며, 사랑 영화 중에서도 ‘촌스럽게도’ 슬픈 사랑 영화를 제일로 꼽는다. 따라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슬픈 사랑 영화를 고르면 남들이 말하는 내 인생의 영화에 해당하는 셈이다.

‘준비되지 않은’ 내가 원고를 쓰기 위해 내 인생의 영화를 정하는 일은, 고민하는 내게 “너는 슬픈 영화 좋아하잖아”라는 친구의 핀잔이 실마리가 됐다. 아무튼, 내 기억 속에서 가장 슬픈 영화는 단연 <러브 스토리>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던가, 기말고사를 앞두고 벼락치기 시험공부에 정신이 없던 어느 날, 1분1초가 아쉬운 판에 TV에서 방영하던 <러브 스토리>에 혼을 뺏기고 말았다. <러브 스토리>를 보느라고 시간을 날린 것은 물론이고, ‘후유증’은 한동안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강렬했다. 대가는 혹독했다. 반에서 20등쯤 했던 성적은 30등 밖으로 곤두박질했고, 담임 선생님께 불려가 “대학갈 꿈도 꾸지 말라”는 불호령과 함께 동네 망신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러브 스토리>를 본 것이 지금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백혈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여자와 그녀를 사랑하는 청년이 있다. 여자는 끝내 눈을 감고, 혼자 남은 남자의 슬픔은 관객의 눈물을 자아낸다. 이처럼 <러브 스토리>는 정말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다. <러브 스토리>하면 요즘 방영중인 TV드라마를 먼저 떠올리는 젊은 관객들에게는 재미없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러브 스토리>는 보통 사랑 영화와는 달리 보는 사람들의 말초신경과 감각기관을 사로잡는 특별한 힘이 있다. 주옥 같은 대사가 빛나는 시나리오, 배우들의 화려하면서도 담백함마저 느껴지는 연기, 아직도 눈에 선한 명장면들, 슬프도록 감미로운 음악이 등이 <러브 스토리>를 ‘아름다운 영화’로 만들어낸다. 그때 나는 <러브 스토리>를 보며 눈이 퉁퉁 붓도록 울어 같이 보던 누나들로부터 구박을 받아야 했다.

“영화가 사람을 이렇게 슬프게 만들 수도 있구나.” 새삼스레 알게 된 영화의 힘(?)으로 인해 나는 매주 ‘주말의 명화’ 시간마다 TV 앞에서 울고 웃었고, 동네 3류 영화관을 들락거리는 횟수가 늘어나게 됐다. 비디오가 있는 집은 부잣집으로 통하던 시절, 내겐 보물창고 같은 존재였던 동네 3류 영화관에서 도시락을 까먹으며 같은 영화를 대엿새번씩이나 보기도 했다. 같이 영화를 보러 다니던 친구 녀석들 덕분에 나는 대학에 연극영화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꼭 같이 연극영화과에 가자며 ‘의리’를 앞세워 유치한 맹세 같은 것을 하기도 했다.

당시 10대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의리의 맹세’ 결연식은, ‘불량서클’에 있던 아이들은 손가락을 살짝 베어 소주에 피를 떨어뜨린 후 나누어 마시는 등 섬뜩하게 치렀으나, 나와 나의 영화 친구들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의 ‘영화딱지(명함 크기 정도의 영화 홍보물인데 앞면에는 영화 포스터가 인쇄되어 있고 뒷면에는 보통 달력이 인쇄되어 있었다. 80년대에는 웬만한 영화는 모두 이런 홍보물을 만들었으며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꽤 소중한 것이어서 그걸 모으는 것이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우린 이걸 영화딱지라고 불렀다)’를 불에 태워 그 재를 소주에 타서 마시며 훗날 영화감독이 되면 그런 영화를 만드리라 다짐했다.

그 의리의 맹세를 하던 날, 나는 영화딱지함에 소중하게 간직했던 <러브 스토리>딱지를 꺼내 들고 나갔는데 그 걸 본 친구 녀석들이 엄청 비웃었고, 그 친구들은 그럴싸한 프랑스영화의 영화딱지를 들고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고 보니, 슬픈 사랑 영화 <러브 스토리>는 정말 ‘내 인생의 영화’였다. <러브 스토리> 덕분에 나는 연극영화과에 진학했고 지금은 영화 만든다고 명함을 내밀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은 생각난 김에 비디오 가게에 들러 <러브 스토리>를 빌려야겠다. 그리고 또 한번 펑펑 울어야겠다.

독자 여러분, 정말 슬픈 사랑 영화 한편을 잘 만들어 보는 게 꿈인데, 혹시 무지무지 슬픈 사랑 영화 시나리오 쓰신 분 있으시면 저희 사무실로 보내 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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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 청년필름 대표·<해피엔드>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