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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호 [41] - 나의 신인중독증, <어둠의 자식들>
2000-01-25

<어둠의 자식들>로 나영희를 데뷔시키다

<어둠의 자식들>

영화에서 캐스팅이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별들의 고향>도 그랬고, <어제 내린 비>도 그랬고 <너 또한 별이 되어> <그래 그래 오늘은 안녕> <바람 불어 좋은 날>, 그리고 <어둠의 자식들>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럴 때마다 현실 도피처럼 신인을 찾았다. <어둠의 자식들>에서도 캐스팅에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은 수없는 오디션을 거쳐 방숙희라는 신인을 찾아냈다. 생김새와 연기력 모두 작품에 잘 맞는 신인이었는데 무엇보다 ‘카수 영애’라는 부제가 말하듯 가수 지망생 역할이어서 가창력이 필요했다. 그 점에서도 합격이었다. 나는 한국영화의 아버지 나운규 감독의 성을 따와 그 신인에게 나영희라는 예명을 지어 주었다. 영화에서 약 2시간가량, 얼굴 클로즈업에서 발끝까지 몸 전체를 속속들이 보여주어야 하는 영화의 주인공을 찾는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 괴로운 일이다. 마오쩌둥과 똑같은 얼굴을 찾으면 전국에서 200명 이상은 찾을 수 있다는 인구 10억의 중국과 달라 한국은 배우뿐만 아니라 어느 분야에서건 인물난이다.

정말 필요한 인물이 절대 부족이다. 영화 제작자들은 그래서 너도나도 주가가 한없이 치솟는 인기 스타만 사모하게 마련이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지만 10억원 이상의 돈을 그야말로 쏟아붓다시피 하는 영화 제작에선 충분히 이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한석규가 영화 제작비의 3분의 1을 가져가도 좋으니 스케줄만 내어 준다면 얼씨구나 할 제작자들이 줄을 선다. 그렇다고 꼭 흥행이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신인을 쓰는 것보다는 훨씬 안심이 된다. 사실 배역에 꼭 맞는 배우를 찾는 일은 주연뿐만 아니라 조연, 단역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주연도 해결이 안 되는 판이니 말해 무엇하랴. 좋은 신인을 찾으면 미래의 영화계를 위해서도 아주 가치 있고 칭송받을 훌륭한 일이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또 관객에게 신선한 모습으로 선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영리한 제작자는 절대 신인 찾기를 솔선하지 않는다. 대중의 관심을 신인은 쉽게 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험 부담을 안고 신인에게 투자했던 고지식한 제작자는 어렵사리 신인을 만들어 놓고도 보람은커녕, 영화가 성공못하면 못하는 대로, 성공하면 성공하는 대로 후회를 하게 마련이다. 자칫 인기가 오르기 시작하면 신인 배우는 이미 신인 배우가 아니어서 파랑새처럼 날아가 버리고 만다. 여기저기 영리한 제작자들이 그제야 인기 오르는 신인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돈에 눈이 멀도록 매수하기 때문이다. 시장이 협소한 데다 영화 제작이 대기업의 시스템으로 성장하지 못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하나같이 일년에 두어편 제작하는 보따리장수들뿐이고 이른바 전속 배우나 전속 감독이 있는 영화제작사가 하나도 없는 우리 현실에서 주기적으로 신인을 공모한다는 것은 꿈도 꿔볼 수 없다. 이렇게 신인이 등장하기 어려운 풍토에서 나는 번번이 신인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었으므로 그 결과가 파란만장했다. 실패와 성공의 부침이 현란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도 신인들하고만 일하고 싶다. 이를테면 신인 중독증이다. 내 호흡에 따라주고 절대적인 시간을 나에게 할애하는 신인은 남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원시림처럼 자유롭다. 힘들지만 곧 머지않아 알맞춤으로 변한다. 물론 어려움이 하나 둘 아니고 실패하기 쉽다. 인내심과 필름과 시간을 너무 많이 소모할 때도 있다. 무엇보다 주위의 반대로 실천하기가 어렵다. 투자까지 기피하고 막히기도 한다. 지금처럼 스타 시스템의 전성기엔 더욱 그렇다. 오히려 스타의 그늘에 숨겨진 신인감독이 등장하기 쉬운 때다. 당장은 만만하기 때문이다.

신인 나영희가 주연한 영화 <어둠의 자식들> 제1부 카수 영애는 어쨌던 크게 성공하여 다음 추석 프로로 계약되어 있는 나스타샤 킨스키와 로만 폴란스키의 <테스>를 뒤로 밀어버리고 추석을 관통했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이 문화공보부는 검열을 통해 이 영화에 해외반출불가라는 꼬리표를 달았고 이어 <어둠의 자식들> 제2부 제작 신고를 받아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후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제목과 원작자 이동철의 이름을 일체 사용할 수 없다는 통고를 해왔다. 한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베를린의 한국인들 가운데 반정부 성격의 유명한 모임이 있어 이들이 베를린영화제 사무국에 <어둠의 자식들>에 관해서 제보했던 모양이다. 영화제 사무국은 다시 한국대사관을 통해 문화공보부와 영화진흥공사에 출품을 의뢰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전달에서 전달을 거치는 동안 교묘하게 와전돼 영화사는 합법적으로 해외반출이 가능한 비슷한 제목의 <오염된 자식>을 보내게 되었다. 영화제가 시작돼 베를린의 동포들이 우르르 상영관에 몰려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내용이 이상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황석영 원작과는 거리가 너무 먼 전혀 딴판의 얘기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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