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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작가열전] 셰익스피어와의 농담따먹기, 톰 스토파드
심산 2000-01-04

지난해 아카데미를 휩쓴 <셰익스피어 인 러브>를 보고 있노라면 열등감에 휩싸인다. 희대의 걸작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셰익스피어의 삶과 작품세계를 마치 자기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훤히 꿰뚫은 상태에서 이리 빠지고 저리 붙이고 하며 자유자재로 스토리를 펼쳐나가는 작가적 기량에 기가 죽을 뿐이다. 그뿐인가? 원전에서 따온 대사들을 위트 넘치게 각색하고,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비주얼의 강점들을 낱낱이 구사할뿐더러, 얄밉게도 상업영화의 핵심인 대중성 내지 흥행성까지도 단단히 틀어쥐고 거침없이 나아가는 솜씨라니… 도대체 이런 수준의 시나리오를 쓰는 놈은 어떤 녀석일까? 자막에 크레딧이 떠오르는 순간 이 시새움 섞인 볼멘 투정은 쑥 들어간다. 바로 톰 스토파드다.

톰 스토파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츨린에서 태어났다. 두살 때 가족 모두가 싱가포르로 이주했으나 그곳에서의 체류 역시 길지는 않았다. 일본군이 침략해 들어오는 바람에 다시 인도로 피난을 떠난 것이다. 이때 남편을 잃은 그의 어머니는 톰이 아홉살 되던 해 영국군 장교와 재혼해 그들 가족은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온 끝에 비로소 영국의 브리스톨에 정착하게 된다. 톰의 성인 ‘스토파드’는 바로 어머니의 두 번째 남편에게서 받아온 것이다.

분방했던 성격의 톰 스토파드는 열일곱살이 되던 해에 학교를 때려치워 버린다. 그는 일찌감치 작가를 꿈꾸며 저널리스트로서의 경력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20대에 접어든 그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그리고 연극을 위한 대본들을 닥치는 대로 써나가는 한편 소설에도 손길을 뻗쳤다. 그렇게 고달픈 작가지망생으로서 근근이 연명해가던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것은 1964년 베를린의 포드재단이 주최했던 극작세미나였다. 세미나에 참가한 그가 과제물로 제출한 작품이 바로 저 유명한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이다.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본래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잠깐 등장하는 별볼일 없는 캐릭터였다. 오죽했으면 로렌스 올리비에의 <햄릿>(1948)에서는 아예 삭제된 배역이 됐을까! 톰 스토파드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햄릿>을 패러디했다. 이들이 파악하고 있는 <햄릿>의 내용은 완전히 엉뚱한 허방짚기의 연속이어서 관객은 배가 아프도록 웃어젖혔다. 그러나 톰 스토파드의 이 독창적인 코미디에는 심오한 철학적 주제 혹은 실존적 슬픔이 배어 있다: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끝끝내 자신들이 그 스토리의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초연(1966)은 대학축제의 일환으로 옥스퍼드대학 연극반에 의해서 초라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반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소문들은 결국 런던을 떠들썩하게 만들더니 이듬해인 1967년에는 기어코 내셔널시어터컴퍼니에 의하여 영국 최고의 무대에까지 올라선다. 그것은 서른살이 채 안 된 청년 톰 스토파드에게는 현기증이 날 만큼 대단한 성공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읊조린 셰익스피어와의 농담따먹기가 그를 유럽 최고의 신세대 극작가로 만들어준 것이다.

이후 톰 스토파드가 펼쳐온 작품활동들은 눈부시다. <점퍼스>(1972), <더러운 속옷>(1976), <밤과 낮>(1978) 등의 작품들이 발표될 때마다 평단은 기립박수를 보냈고 관객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의 작품세계를 특징짓는 것은 결코 양립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양극단의 결합이다. 즉 진지한 철학적 주제를 위트와 풍자가 넘쳐나는 대사와 유머러스한 비주얼에 담아내는 것이다. 그는 또한 인권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여 세계 전역의 양심수 혹은 반체제인사들에 대한 구명운동에 앞장서온 작가로도 유명하다. 자신의 조국인 체코를 방문하여 바츨라프 하벨(훗날 대통령이 된 극작가)을 만나기도 하였고, 앰네스티의 자격으로 소련을 방문하여 반체제인사들과 광범위한 접촉을 갖고 그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유럽 최고의 극작가라는 후광을 등에 업고 진출한 까닭에 영화계에서의 그의 행로 역시 탄탄대로였다. 필모그래피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는 늘 최고의 감독들과 함께 일했다. 오리지널 시나리오인 <여인의 음모>가 아카데미 각본상에 노미네이트된 이후로는 바다 건너 할리우드로부터의 구애도 끊이지 않았다. 비록 오리지널 시나리오는 아니지만 <태양의 제국>이나 <러시아하우스> 같은 작품에서 그가 살아온 인생편력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출세작인 <로젠크란츠…>를 직접 연출해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그가 또다시 <셰익스피어 인 러브>로 기어코 아카데미 각본상까지 거머쥔 것을 보면 아무래도 톰 스토파드와 셰익스피어 사이에는 하늘이 점지해준 인연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톰 스토파드의 최신작은 <슬리피 할로우>. <쎄븐>(1995)의 작가 앤드루 케빈 워커와 그가 공동집필한 시나리오에다가 할리우드의 기괴한 천재 팀 버튼 감독이라…, 그들의 이름만으로도 짜릿한 흥분이 느껴진다. 듣자하니 미국에서는 이미 놀라운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어디 이번에도 우리를 열등감에 휩싸이게 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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