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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죽음을 슬퍼하며, <일 포스티노>
1999-12-21

과문의 탓인지 모르겠으나 오늘의 프랑스에서는 시(詩)도 시인도 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과거에 읽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지금에는 텔레비전, 영화, 컴퓨터 등이 토해내는 화면의 홍수 속에서 보고 즐기는 사람들로 바뀐 것인지 모른다. 이른바 ‘흥행 사회’에서 시인들이 소리 소문없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남의 땅에 있지만 아내와 나는 ‘창작과 비평사’가 고맙게도 꾸준히 보내주고 있는 시집들을 읽고 있다. 한국사회에 아직 시인들과 시들이 꿈틀대며 살아 있음은 실로 놀라우면서도 다행스런 일이다. 그 시들이 가벼운 언어의 조합이나 유희들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수들이라면 말이다. 인간의 소박한 꿈과 이상은 현대에 올수록 더욱더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다. 그래서 시인을 일컬어 ‘현실로부터 스스로 추방된 사람’이라고 부르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현실로부터 추방되고 물질이 가난한 시인들만이 이 팍팍한 시기에 인간성의 풍요로움과 깊이를 보여줄 것이다.

또 하나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가 부르주아적 인습주의에 의해 시의 세계가 죽어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면, <일 포스티노>에서 주인공의 죽음은 이데올로기에 의한 시인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다. 아니, 이데올로기에 의하지 않더라도 시인의 죽음은 이미 예고됐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인간성은 이미 현대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중해 위의 외딴 마을. 푸른 바다보다 더 파란 하늘과 파란 하늘보다 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어느 이름없는 우편배달부는 먼 데서 온 이방인과 벗이 되고 시를 쓴다. 그의 행복은 다만 단순함에서 오고 자연과 벗함에서 온다. 다시 먼 데로 떠난 벗에게 보내기 위해 정성스럽게 구닥다리 녹음기에 자연의 소리를 담는다. 파도 소리, 바람 소리,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의 소리와 뱃속 아기의 숨소리까지…. 시인보다 더 시인인 그의 모습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아름답게 보이는 까닭을 우리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또 하나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의 본원적인 인간 관계, 외딴 마을 사람의 순진무구한 인간성, 그리고 대자연과의 조화가 없다면 말이다.

결국 우리는 장래에는 지구상 어디에서도 <일 포스티노>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일 포스티노> 자신도 소박하게 꿈꾸었던 사회주의 이상은 이미 옛 이야기가 되었다. 이른바 세계화의 시대, 그리고 디지털 정보화의 시대에 인간들의 꿈과 이상은 그야말로 덧없고 하릴없는 것이 돼버린 게 아닐까? 정보시스템의 발달로 멀리 있는 사람들과도 소통할 수 있다고 사람들은 믿지만 실제로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하고도 멀어지면서 점점 더 외로운 모래알이 돼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물질은 풍요로워지더라도 인간의 정신은 더욱더 가난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일 포스티노>가 살던 그 마을에도 지금은 온갖 화면들과 상품들과 그리고 관광객들이 덮치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성에도, 인간 관계에도 그리고 자연에도 ‘풍요’와 ‘복잡’이라는 이름의 기름때가 묻고 있을 터이다. 그러므로 <일 포스티노>는 이미 과거의 인물이다. 우리에게 잠깐 손짓하고 사라진 과거의 인물. 영화 속이 아니더라도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런데 과연 지금 누가 있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할까?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번 <일 포스티노>를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파리에 <일 포스티노>는 비디오로도 존재하지 않았다. 007 시리즈나 할리우드산 영화의 비디오들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는데. 상혼마저 시인의 혼을 버린 것일까, 아니면 시인의 혼이 스스로 이 세상을 떠난 것일까?

한편, 과거로 사라진 ‘인간’ <일 포스티노>는 그리워하면서도 ‘영화’ <일 포스티노>에 대한 의문은 그대로 남아 있다. 영화라는 매체가 갖고 있는 성격 때문이다.

예부터 인간을 가리켜 소우주라고 일컬었다. 또 가장 아름다운 것은 길섶에 핀 꽃도 아니며,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도 아니고, 그것은 인간 내면의 광휘라고 했다. 그런데 인간 내면은 결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기 위한 영상에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 내면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흔히 명작일수록 영화화한 것을 보지 말라고 충고해준다. 그런 충고에도 불구하고 움직이는 화면이라는 마력에 이끌려 나 역시 영화를 보고말지만 보고나면 여지없이 후회하고 만다. 단 한번의 예외가 없었다. 그렇다면 ‘영화’ <일 포스티노>가 보여준 아름다움조차 인간 내면의 깊이에 비하면 가볍기만 한 게 아닐까? 문외한에 지나지 않는 나의 어줍잖은 의문일 수도 있다.

한국의 영화인들은 어떤 대답을 갖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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