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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배우, 날개를 달다, <사랑니>의 김영재
사진 오계옥오정연 2005-10-24

가을이 가득 내려앉은 삼청공원에서 그를 만났다. 청량한 햇살을 즐길 만한 벤치를 찾아가는 길, <사랑니>의 김영재는 말한다. “이 공원 많이 와봤어요. 영화 찍기 전에 이 일대를 혼자서 많이 돌아다녔거든요. 정우는 인영이랑 동네를 산책하면서 무슨 말을 했을까, 어떤 추억이 있을까 생각해봤죠.” 고개를 끄덕이며 상상해본다. 한옥이 늘어선 골목마다, 맛집이 유혹하는 찻길마다, 여린 나뭇잎이 떨어진 공원벤치마다, 곳곳에 서려 있을 인영과 정우의 일상을 곱씹었을 그의 걸음들. 먼길을 돌아 곁에 두게 된 오랜 이성친구 인영이 뒤늦게 사랑을 앓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는 사려 깊은 동거인, 정우의 안정적인 품새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모르긴 몰라도 정우는 여자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을 거야.” 촬영 전 정지우 감독은 김영재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놓고 질투하지 않으면서도 매사를 꼼꼼히 챙겨주는 속깊은 이성친구, 정우. 그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을 알게 된 나이의 여성이라면 누구나 꿈꿔봤을 어떤 판타지의 전형이다. 물론 시나리오를 처음 읽고 정우에 대해 “뭐야 이거, 이런 사람이 어딨어?”라며, 여느 평범한 남자와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인 김영재에게, 그는 그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대체 어떤 이유로 이혼을 하고 인영과 동거를 하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 연애에 자신을 던지는 인영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떤 것인지, 하다못해 직업은 무엇인지, 이는 시나리오에서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불친절하기로는 감독 역시 마찬가지. 직업에 대해서는 “한번쯤 양복을 입는 연구원이었으면 좋겠다”는 정도, 정우의 감정에 대해서는 “그냥 알아서 해라”가 끝이었다. 지극히 비현실적이면서도, 공기처럼 편안하고 익숙한 이 캐릭터 속 감정의 결을 채우는 것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그러나 해답은 의외로 멀지 않았다. 조바심을 버리고 느긋하게, 감정을 열어둔 상태로 촬영에 임할 것. “햄버거집에서 어린 이석과 인영이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하는 장면을 찍었는데, 둘이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실제로 질투심이 생기더라고요. 감정선이 좀 과했는지, 감독님은 계속 ‘영재, 진정해’라고 하시고, 결국은 재촬영했어요.” (웃음) 김정은과 이태성은 앞선 촬영을 통해 제법 탄탄한 캐릭터를 구축하고 있었고, 그 장면으로 촬영에 합류한 김영재는 혼자서 준비한 각종 설정을 조금씩 조절해야 했다. 실제와 영화가 오버랩되며 유발되는 생생한 감정이었던 셈이다. 정우의 속내를 단번에 이해하게 된 순간은, 정우가 어른 이석을 데리고 인영과 이석의 데이트 현장을 급습한 장면이었다. “그동안 나는 인영에 대한 사랑에 얽매여 있었는데, 그날 거기서 석이를 막상 보니까 진짜 애처럼 여겨지더라고요. 정우는 아마 그때 ‘아, 얘 때문에 내가 조바심을 느낄 필요는 없겠구나’라고 확실히 느꼈을 거예요. 저 역시 그 이후부터는 정우의 태연함을 이해할 수 있었고요. 아마 영화가 끝나고 난 뒤, 결국 인영과 함께하는 건 정우일걸요.”

김영재는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고 기다리는 일에는, 꽤나 자신이 있는 편이다. 배우를 결심한 6년 전부터 지금까지. 그는 <나는 날아가고… 너는 마법에 걸렸으니까> <후회해도 소용없어> <이공프로젝트> 중 <따로 또 같이>(허진호) 등의 단편에서 주연으로, <싱글즈> <거미숲> 등의 장편에선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100번도 넘게 오디션을 봤다. 다른 모든 배우 지망생처럼 내 것인 줄 알았던 비중있는 역할을 눈앞에서 빼앗기기를 몇 차례, 가장 먼저 배워야 할 덕목은 느긋한 기다림의 자세였다. 좋은 배우가 되려면 많은 것을 보고 느껴야 한다는 말에 떠난 여행길. 안동에서 보길도까지 이어지던 여정의 중간, 부산에서 해남까지 꼬박 걸었던 기억은 그 기다림을 형상화한 일화와도 같다. 책이며 음악도 없이 떠난 그 길에서 오로지 주변 풍경과 현지인들에게만 집중한 결과, 그는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10월 말부터 방영될 드라마 <이 죽일놈의 사랑>에, 비의 형으로 캐스팅된 소식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앞으로 몇달은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지만, ‘단편에 꾸준히 출연한 배우라는 의식을 가진’ 그가 영화에 끌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앞으로 또 얼마만큼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야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얼마나 왔나 싶어 돌아보니 떠나온 곳은 아득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러나 뚜벅뚜벅 내딛는 그 발걸음이, 시간과 함께 경쾌함을 더해가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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