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타이영화가 온다
2001-08-03

아시아영화의 새로운 용이 꿈틀거린다

자국영화 연일 흥행기록 경신, 150억짜리 영화 만들며 산업화 시동

도대체 타이영화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1997년 세명의 신인감독이 동시에 데뷔를 하였다. 당시 타이는 금융위기의 와중에 있었고 영화산업 역시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해에 100여편을 만들던 규모에서 20편 미만으로 뚝 떨어진, 그야말로 암담한 현실 속에서 미래를 걱정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런데 이들 세명의 감독이 내놓은 데뷔작들은 종래의 타이영화와는 전혀 새로운 작품들이었고, 2001년의 시점에서 보면 그것은 타이영화의 부활의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논지 니미부트르의 <댕 버럴리와 그 일당들>과 옥사이드 팡의 <달리는 사나이>, 그리고 펜엑 라타나루앙의 <펀 바 카라오케>(이들 3편은 모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바 있다) 등은 비록 평단의 논란은 있었지만, <댕 버럴리와 그 일당들>이 당시까지의 모든 타이영화 흥행기록을 갈아치움으로써 최소한 산업적 가능성은 입증해 보였다. 그리고 그러한 가능성은 이제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1999년 논지의 <낭낙>은 타이에서 <타이타닉>의 흥행기록마저도 넘어서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2000년에는 용유스 통큰턴의 <철의 여인들>이 역시 할리우드영화를 물리치고 그해 최고 흥행기록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올해 들어 타이영화의 선전은 눈부시다. 상반기에만 흥행 1, 2위를 차지한 작품이 모두 타이영화였다. 지난해 연말 개봉한 타니트 지트나콘의 <방라잔>과 <킬러 타투>가 그것으로, 이들 작품은 모두 흥행수익 1억바트(약 30억원)를 넘어섰다. 올해 개봉된 할리우드영화 중에 아직 흥행수익 5천만바트를 넘어선 작품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타이영화가 자국시장에서 얼마나 위세를 떨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또다른 수치를 보자. 1997년 이후 12%까지 떨어졌던 타이영화의 시장점유율이 올해는 20%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며, 할리우드영화의 평균 상영일수가 6주에서 4주로 떨어졌다는 기록도 나와 있다. 그러나 타이영화의 선전은 하반기에 더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논지 니미부트르의 <잔다라>와 MC 차트리찰레름 유콘의 대서사극 <수리요타이>, 그리고 펜엑 라타나루앙의 <몬락 트랜지스터> 등과 같은 기대작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타이영화의 선전은 자국시장에서 그치지 않는다. 필름방콕사의 경우 지난해에 위시트 사사나티앙의 <검은 호랑이의 눈물>과 옥사이드·대니 팡의 <방콕 데인저러스> 단 두편으로 200만달러의 해외수익을 올렸다. <낭낙>이나 <철의 여인들> <방라잔> 역시 상당한 액수의 해외판매 수익을 올리고 있다. 포르티시모나 골든웨이 등과 같은 해외 세일즈사들은 이제 타이영화의 단순한 해외 세일즈에서 벗어나 제작단계에서부터 타이의 제작사들과 협업체제를 유지해가고 있다.

제작비 증폭, 상영관 확대

10여년 전 타이영화의 한편당 평균 제작비는 500만바트(약 1억5천만원)였다. 그런데 지난해 평균제작비는 1500만바트였다. 10년 사이 세배가 뛴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1999년 타이영화사상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운 <낭낙>의 제작비가 3천만바트였지만, 지난해 연말 개봉된 <방라잔>의 제작비는 그 두배가 넘는 8천만바트였다. 하지만 이 기록도 <수리요타이>에 오면 비교 자체가 무색해진다. 오는 8월 왕후의 생일에 맞춰 개봉하는 시대극 <수리요타이>의 제작비는 무려 5억바트에 달한다. 우리돈 약 150억원의 제작비가 단 한편에 투입된 것이다(국내에서 최고의 제작비를 들인 것으로 추정되는 <무사>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도 제작비가 60, 70억원선이다). 물론 <수리요타이>는 타이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만들어지는 특수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타이영화 제작비의 상승폭은 숨이 가쁠 정도이다.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물론 타이영화의 흥행가능성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와 기대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투자가 가능한 타이영화산업의 구조에 기인한 바도 있다. 현재 타이의 영화산업구조는 5개 정도의 거대 회사가 제작 및 배급을 거의 독점하고 있다. 타이 엔터테인먼트사의 경우 제작은 물론 빌리지 로드쇼와 합작으로 EGV라는 극장체인을 소유하고 있으며, 가장 역사가 오래된 파이브 스타나 UMG 역시 제작사와 함께 극장체인을 소유하고 있다. 이번에 <수리요타이>를 제작한 사하몽콘필름이 바로 UMG의 자회사이다. 또한 TV방송사를 소유한 종합멀티미디어회사인 BEC-Tero그룹은 필름방콕이라는 제작사를 자회사로 거느리고 있다. 그리고 RS프로모션은 레드 로킷과 아봉이라는 제작사를 두고 있다. 이들 회사들은 대부분 방송, 음반, 영화 등 그야말로 모든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취급하는 종합멀티미디어회사들이다. 이들 그룹들은 애초부터 자본력이 풍부한데다가 금융위기 때 축소했던 영화제작을 최근 다시 늘리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웬만한 지명도가 있는 감독의 경우 제작비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상황이 바뀐 것이다.

타이영화의 제작이 늘어나는 데에는 상영공간의 확대 또한 주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타이 전역에는 약 200여개의 스크린이 있다. 인구 6천만명에 비해 너무 적은 숫자인데, 최근 ‘메이저 시네플렉스’라고 하는 멀티플렉스 체인이 급격하게 스크린 수를 늘려나가면서 다른 극장 체인에도 자극을 주고 있다. 그리고 이같은 극장환경의 변화에 따라 수익률이 높아지리라는 기대가 투자자들을 타이영화제작에 대한 투자로 유인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 시선의 힘, 중견감독의 회춘

90년대 중반 이전까지 타이영화를 지배하던 장르는 청소년영화와 범죄영화였다. 특히 범죄영화는 비록 상업영화지만 타이영화가 적어도 아시아권에서는 경쟁력을 가질 만큼 높은 수준을 보여준 장르였다. 97년 이후 타이영화의 경향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청소년영화가 거의 사라진 반면 범죄영화는 여전히 강력한 상업적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코미디와 시대극이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젊은 감독과 제작자의 등장이라는 요인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그들 대부분은 CF와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타이의 CF 수준은 아시아권에서는 상위급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새로운 감각과 연출력으로 무장한 그들의 작품은 곧 젊은 관객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를테면 논지의 <낭낙>의 경우 이야기 자체는 타이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전설이었기 때문에 자칫 외면당하기 쉬운 소재였다. 더군다나 그동안 영화나 TV드라마로 만들어진 것만 해도 20편이 넘는다. 그런데도 논지는 누구나가 다 아는 소재를 가지고 최고의 흥행기록을 일구어냈다. 그는 이 이야기에 전혀 다른 해석을 내리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나갔다. 과거 TV나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낭낙의 이야기는 죽은 낭낙이 재혼한 남편과 남편의 새 아내에게 가하는 복수쪽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논지는 복수보다는 낭낙의 죽음을 초월한 사랑, 그리고 죽은 아내를 위해 출가하는 남편의 지순한 사랑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에 대해 특히 여성관객이 열광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펜엑이나 옥사이드, 용유스 역시 새로운 감각과 신인답지 않게 탄탄한 스토리텔링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젊은 관객을 끌어들이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영화는 세계적 보편성이 있다. 말하자면 그들의 영화가 세계 곳곳의 관객에게 익숙하게 다가간다는 것이다. 펜엑의 영화에서 타란티노를 떠올리거나 옥사이드 영화에서 홍콩영화의 분위기를 읽는가 하면, 게이와 복장도착자들의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나간 용유스의 <철의 여인들>은 지난해 전세계 영화제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품 중 하나였다.

이처럼 1997년 이후에 불기 시작한 타이영화의 새로운 바람은 주로 젊은 신인감독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한 가지 흥미있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타이 엔터테인먼트가 신인감독을 기용하여 성공을 거둔 뒤 메이저 영화사들도 이에 자극을 받아 타이영화에 투자를 늘리기로 했고 재미있게도 그 혜택이 중견감독들에게도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거의 뒷전에 밀려나 있던 유타나 묵다사니트, MC 차트리찰레름 유콘, 처드 송스리, 번디트 리타콘, 타니트 지트나콘 등이 바로 그들이다. 메이저사들이 국산영화에 투자를 늘리기로 하였지만,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만한 젊은 감독의 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중견감독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한 때문이다. 이중 번디트 리타콘의 <스탕>이나 타니트 지트나콘의 <방라잔>은 흥행에서 성공을 거둠으로써 이들의 입지는 훨씬 탄탄해졌다. 하지만 그들의 성공이 젊은 제작자나 제작사들의 새로운 제작방향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 역시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 타이영화는 전통의 단절이 아닌 신구세대의 공존이라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독립영화는 살아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타이영화는 전반적으로 상업성에 그 무게중심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직 타이영화만의 독창적 미학을 이야기하기에는 이른 것이다. 반면 타이의 단편영화나 다큐멘터리, 실험영화 등과 같은 비주류영화, 그리고 영화문화의 현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가 준비하는 ‘타이영화 특별전’은 이러한 비주류영화나 영화문화의 현주소에 대해서도 관심의 끈을 놓지 않을 예정이다.

타이에는 방콕국제영화제와 같은 대규모 영화제 외에도 방콕실험영화제나 타이단편영화와 비디오페스티벌(TSFVF) 같은 조그마한 영화제들도 있다. 올해로 3회째를 맞는 방콕실험영화제는 격년제로 개최되는 영화제로, 타이에서의 실험영화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타이에서 실험영화는 70년대 반종 코사와타나라고 하는 선구자가 있었고, 80년대 독일문화원인 괴테 인스티튜트의 강좌와 워크숍을 통해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97년에 처음 방콕실험영화제가 열렸을 때에는 이에 반대하는 데모가 있었을 정도로 대중적인 인식은 미미했다. 하지만 이제는 실험영화만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영화사 ‘킥 더 머신’이 만들어졌는가 하면, 아피찻퐁 위라세타쿤과 같은 주목할 만한 실험영화 작가도 배출되었다.

올해로 5회째를 맞는 TSFVF는 돔 숙봉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는 열악한 타이의 영화문화 풍토 속에서 그야말로 소금과 같은 존재이다. 평론가였던 그는 80년대 초부터 필름 아카이브를 만들자는 캠페인을 혼자 시작해 마침내 1984년에 이를 성사시킨 인물이다. 그가 필름 아카이브를 설립하기까지에는 너무나 많은 비화들이 있다. 그는 왕족을 움직여 필름 아카이브를 설립하는 길을 택하였고, 그 구체적 방법으로 20세기 초 유럽을 방문하였던 국왕의 모습을 담은 필름이 몇몇 유럽국가의 필름 아카이브에 남아 있으며, 이를 찾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그리하여 아누소른 몽콜카른 왕자의 도움을 얻어 타이 필름 아카이브를 설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좀더 다양한 영화문화의 확산을 위해 새로운 기구의 설립을 생각하였고, 마침내 1994년 타이 필름 파운데이션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 타이 필름 파운데이션의 주요 사업 가운데 하나가 TSFVF이다. 그러나 타이 필름 파운데이션의 현황은 그다지 여의치 않다. 타이 필름 아카이브가 국립인데 반해 타이 필름 파운데이션은 순수 민간기구이기 때문이다. 사무실도 타이 필름 아카이브 건물의 한 귀퉁이를 얻어 쓰고 있으며, 봉급을 받는 정규 직원도 1명뿐이다. 나머지 직원들은 대부분 무보수 자원봉사자들이다. 그들 모두는 평생을 타이영화의 역사를 정리하고 영화문화의 확산을 위해 바친 돔의 열정과 정신에 감화된 사람들이다.

방콕실험영화제와 마찬가지로 TSFVF는 타이의 대안영화, 비주류영화의 확산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현재 타이에는 명문 탐마사트대학과 출라롱코른대학 등 모두 5개 대학에 영화 관련학과가 있으며, 대부분의 단편영화들이 이들 대학에서 나오고 있다. 하지만 킥 더 머신과 같은 독립영화사에서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워크숍을 열고 있으며, 일반인이 만드는 단편영화도 상당한 숫자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펜엑이나 옥사이드와 같은 젊은 감독들이 이러한 워크숍에 기꺼이 강사로 참여해 주류영화와 비주류영화의 교류에 힘을 보태고 있다. ‘제2의 한국’이 될 수 있을까?

최근 타이영화의 현황은 여러모로 한국의 그것과 유사하다. 젊고 유능한 제작자와 감독들의 대거 등장, 해외로부터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다는 점, 제작자본 공급처의 새로운 창출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타이영화의 미래까지 안전하게 보장해주지는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타이영화만의 독창적 미학이 아직까지 확립되지 못한데다가 감독과 제작자의 기능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전근대적인 제작시스템, 검열 등 지나치게 엄격한 정부의 영화정책 등이 앞으로도 타이영화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타이가 ‘제2의 한국’이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단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설사 그렇게 되지 못할지라도 논지 니미부트르, 펜엑 라타나루앙, 위시트 사사나티앙, 옥사이드 팡,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등과 같은 작가의 등장은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영화사에서 타이영화의 입지를 분명히 각인시키는 중요한 의미를 남길 것이다.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 “타이영화가 온다

▶ 돔 숙봉의 외길 인생

▶ <낭낙> <잔다라> 감독 논지 니미부트르

▶ 실험영화 위해 ‘킥 더 머신’ 설립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

▶ 2001 하반기 타이영화 기대작

▶ 국내 개봉 앞둔 타이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