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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의 영화교양백서] 와인 애호가처럼 보이는 법

영화 <사이드웨이>

<씨네21>을 줄을 치며 읽고 <열려라 비디오> 같은 가이드북을 머리맡에 두고 자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당연히 남자 친구도 심야 영화제에서 우연히 만난 감독 지망생이어야만 마땅할 것 같았다.

나는 그만큼 영화를 좋아했던가? 물론 좋아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열정이 100% 순수였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한때는 영화였지만 지금은 ‘아는 척’ 하기에 와인만큼 좋은 아이템이 없는 듯 하다. 와인의 역사는 영화의 1백년 역사보다 유구하고, 그 장르(포도 품종만 40종이 넘는다)와 종류는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 오랜 역사와 다양한 품종은 섬세한 취향을 요구하고, 그 취향이 곧 문화가 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사이드웨이>다.

<사이드웨이>를 보기 전까지 나는 카베르네 쇼비뇽과 샤도네이로 만들어진 와인을 무척이나 신뢰하고 있었다. 무슨 수학 공식처럼 레드 와인은 역시 카베르네 쇼비뇽이고, 화이트 와인은 샤도네이라고 외우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제 막 와인의 세계에 입문한 내가 경험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포도 품종은 카베르네 쇼비뇽에 비해 탄닌 성분이 적고 훨씬 더 부드러워서 초보자도 마시기 좋은 메를로이었다.

그런데 본격적인 와인 영화라고 해서 반가운 마음으로 달려갔더니 그 영화에 등장하는 마일즈라는 와인 애호가는 내가 좋아하는 와인들에 대해서 가차 없는 혹평을 내리고 있었다. “카베르네는 매력이 없고, 메를로는 개성 없는 와인을 분류할 때 빠지지 않는 전형적인 와인이지. 샤도네이? 가장 순수성을 잃은 와인이야.”

하지만 마일즈라는 남자는 ‘아는 척’ 하기 좋아하는 고상하지만 어딘지 재수 없는 와인 드링커로 분류하기엔 처지가 딱한 부류다. 아내는 2년 전에 떠났고 그 자리를 와인과 우울증 약으로 달래는, 박봉의 영어 교사지만 실은 소설가가 되고 싶은 소심하고 예민한 중년의 남자. 게다가 키도 작고 못 생겼다. 그런 그가 좋아하는 와인이 ‘피노 누와(Pinot-noir)’다. “피노는 까다롭고 재배하기 어려운 품종이지만 그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는 와인이지. 신경 안 써줘도 아무데서나 자라는 카베르네와는 달라. 끊임없이 신경 쓰고 돌봐줘야 하는 골치 아픈 녀석이지만 굉장히 복잡하고 다양한 맛을 지녔거든.”

이 영화를 보고 내 친구는 와인 전문점으로 달려가 다짜고짜 피노 누아를 달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이제 막 팝송이라는 걸 알게 된 순진한 소년이 레코드 가게 문을 열고 “아저씨, 팝송 주세요.” 했다는 일화가 떠올라 친구를 보며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와인 매장 사람들은 개떡 같이 물어도 철떡 같이 알아듣고 피노 누아로 만든 이러저런 와인을 소개해줄 것이다.

보통 와인은 개인적인 취향과 경험, 매너, 그리고 해박한 지식 등이 한데 어우러져야 비로소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술로 알려져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자신의 취향과 트렌드에 어울리는 것을 찾아 이름 몇 개만 외워도 충분히 자기 방식대로 와인을 즐길 수 있다.

예를 들어 요즘 와인바나 레스토랑에서 칠레 와인을 찾는 사람이 무척 많아졌다. 칠레는 신흥 와인 생산국의 대표주자쯤 되는데, 무엇보다 프랑스나 독일, 이탈리아 같은 와인 생산 종주국보다 와인 가격이 20~30퍼센트 정도 싸지만 가격 대비 품질과 맛은 매우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럽산 와인은 빈티지(Vintage: 포도수확 연도)에 따라서 맛이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지만, 칠레 와인은 품종이나 연도에 따른 맛의 차이가 거의 없다. 게다가 떫은 맛(탄닌)이 적고 잘 익은 과일 향이 시원스럽게 드러나기 때문에 초보자들도 맛있게 마실 수 있다. 물론 <사이드웨이>의 마일즈 같은 와인 전문가들이 느끼기에는 깊은 맛이 덜해 단순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참, 마일즈가 샌포드 와이너리에서 발포성 와인 뱅 그리(vin gris)를 마시며 했던 말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그는 와인보다 여자를 더 좋아하는 친구 잭에게 ‘시트러스와 딸기, 아스파라거스와 치즈향이 난다’고 말한다. 와인은 마일즈처럼 향기로 이야기하는 술이다. 누가 방금 마신 와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본다면, 그리고 당신이 와인 초보자나 문외한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민트 아로마가 근사하네요.” 라든가 “부케가 아주 좋은데요.” 정도로 말하는 게 좋다고 한다. 뭐 그러면 와인 애호가처럼 보인다나?

Body - 보통 카베르네 쇼비뇽(레드 와인의 대명사)이나 샤도네이(화이트 와인의 대명사)처럼 알코올 함유량이 높고 무거운 질감의 와인을 풀 바디(Full Body)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바디는 ‘농도와 깊이’를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미디엄 바디’를 선호한다.

Tannin - 탄닌은 포도 껍질에 함유된 성분인데 풀 바디 와인에서 느껴지는 텁텁하고 떨떠름한 쓴 맛은 이 탄닌 성분 때문이다. 와인 애호가들은 좋아라 하고 초심자들은 고개 젖고 마는 바로 그 맛.

Dry - 달지 않은 맛을 드라이하다고 표현하는데 주로 샤도네, 버건디, 쇼비뇽 블랑 같은 화이트 와인을 얘기할 때 쓴다. 참고로 샴페인도 그렇지만 화이트 와인은 고가일수록 맛이 드라이하다.

Finish - 와인을 마시고 났을 때 남는 여운을 말한다. 주로 이런 식으로 말한다. “피니시에서 힘이 느껴지네요.” “피니시가 약한 데요.” “기분 좋은 피니시, 좋은데요.”

Decanting - 오래된 레드 와인의 찌꺼기를 제거하기 위해서 디캔터라고 불리는 주둥이 좁은 용기에 옮겨 담는 일. 오래되지 않은 와인이라도 공기에 접촉시킴으로써 향을 풍부하게 풀어내기 위해서 디캔팅을 하는 경우도 있다.

Oaky - 최상급 와인들은 보통 오크 통에서 몇 년간 발효하고 숙성하는데 그러면 바닐라나 버터, 혹은 볶은 커피 같은 오크 향이 나는데 그런 와인을 오키하다고 표현한다. 어떤 와인들은 신선한 청량감을 위해서 일부러 오크 통에서 숙성시키지 않기도 한다.

Soft - 시지 않고 부드러운 와인을 표현할 때 쓴다.

Bouque - 포도의 발효과정에서 나는 향을 아로마(Aroma)라고 하고 충분히 숙성시켰을 때 나는 향을 부케(Bouquet)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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