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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사이에서 피어난 괴식물의 영화, <보이지 않는 물결>

한국에서는 개봉되지 않은 펜엑 라타나루앙의 세 번째 장편영화 <몬락 트랜지스터>에서 주인공은 가수가 되고 싶어 무작정 방콕으로 흘러들어온 시골 청년이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그의 여정은 금방 끝날 듯하다 다시 이어지면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야기의 운명인 것처럼 연장된다. 상영시간은 짧은데도 몸은 그렇게 느낀다. 그 때문에 영화는 플롯의 긴장이란 걸 모르고 만든 촌스러운 아마추어의 작품처럼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여정 어딘가에 이미 신기한 끌림이 있었다. 네 번째 장편영화이자 첫 번째 한국 개봉작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그러나 이 제목보다는 원제가 더 절묘하다. 원제는 <우주에서의 마지막 삶>)는 마치 다른 감독이 만들었다고 착각할 만큼 영화적 세련미를 갖추고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이 영화의 백미는 소파에 앉아 잠든 두 주인공 남녀 주변의 공중을 사물들이 유영하듯 날아다니는 ‘무중력 판타지’가 펼쳐질 때다. 이 순간의 무중력 풍경은 다름 아니라 주인공들의 내부를 물질의 상태로 끄집어 내놓은 것이었다. 이렇게 두편의 일부를 빌려 전제하고 싶은 것. 정착없이 지연되는 여정이건, 중력으로부터의 탈피건, 관계와 인연의 끈을 놓치고 빈손으로 서 있는 자 또는 영토와의 마찰력을 상실해버린 채 유령처럼 허무하게 떠 있는 자의 상태를 그리는 데에 펜엑이 계속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마카오의 식당에서 일하는 요리사 쿄지(아사노 다다노부)는 사장의 아내와 바람을 피우다 이미 들킨 뒤다. 그 대가로 그녀를 독살하고 푸켓에 잠시 도피해 있으라는 사장의 명령을 충실히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여자를 죽이고 푸켓행 배에 올라탄 쿄지. 그는 거기에서 노이(강혜정)라는 묘령의 여자를 만난다. 니드라는 갓난아기의 엄마이기도 한 이 여자에게 쿄지는 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크게 진전되지 않는다. 푸켓에 도착한 쿄지는 강도를 만나 돈과 물건을 털리고, 사장이 지정해준 연락책을 만나 도움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쿄지는 곧 그들이 강도였으며, 사장의 명에 따라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하고 있음을 알고 도주한다. 그 길에서 다시 우연히 노이를 만나게 된다. 쿄지는 이제 사장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하고 마카오로 돌아온다.

이렇게 쓰고 보면 이 영화는 영락없이 긴장감 넘치는 서스펜스영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물결>에는 서스펜스가 보이지 않는다. 가능성이 희박한 일들이 곧잘 일어나면서 서스펜스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분위기를 주입한다. 영화의 방향을 단박에 알아차리기도 어렵다. 이유는 우선 관객에게 있기보다 억지 플롯을 태연하게 이 안에 집어넣은 감독에게 있다. 예를 들어, 노이와 사장의 관계를 관객은 영화의 후반부에 가서야 알게 될 텐데, 그걸 알고 나면 관객은 물을 것이다. 왜 쿄지와 노이는 같은 배에 타야만 했던 것인가. 한편, 사장의 부인은 영화의 초반부 한 중년 남자의 사진을 보며 당신은 아버지와 닮지 않았다고 쿄지에게 말하는데, 그 사진 속의 남자는 영화 속에서 수수께끼처럼 두번이나 출연할 뿐 아니라 쿄지는 그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군다. 그렇다면 그 남자는 과연 아버지인가, 아니면 그 누구인가. 이것은 실제 만남인가 아니면 상상인가. 또한 쿄지의 멀미는 두번 반복되는데, 그것은 배멀미인가 죄 멀미(?)인가.

<보이지 않는 물결>을 볼 때 흥미를 끄는 건 어느 것이 지금 쿄지의 여행을 따라 흘러가는 기능적 스토리이며, 어느 것이 지금 쿄지의 의식에서 흘러나와 형체를 얻은 장면(내지는 인물)인지를 가늠하면서 보는 것이다. 그게 <보이지 않는 물결>의 독법이라면 독법이다. 이 둘은 영화 속에 희미한 표지로 섞여 있다. 이른바 내부 안의 외부, 외부 밖의 내부라는 불가능의 양상으로 감독은 이 영화를 굴절시키고 싶어 한다. 때문에 우리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감상하듯 이 영화를 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다보면 다소 억지스런 이 엉터리 이야기에 공간의 축지(縮地)현상과 시간의 파편화 과정이 개입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영화는 마치 온 세상이 마술처럼 끌어당겨져 접혀버린 땅인 양 쿄지와 노이를 중요한 순간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치게 한다. 그 둘 사이의 관계는 별 진전이나 후퇴가 없다. 다만 둘 사이에 있었던 어떤 시간이 뒤늦게 출현한다. 이를테면 춤을 추어 줘서 고맙다고 쿄지에게 말하는 배 위에서 노이의 대사와 그 둘이 호텔에서 만난 뒤 등장하는 춤추는 장면을 관객은 연결해서 보아야만 할 것이다.

비유적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보이지 않는 물결>은 콘크리트 사이에서 피어난 괴식물의 영화다. 주인공 아사노 다다노부는 그런 느낌에 걸맞은 식물성 인간이고, 크리스토퍼 도일의 카메라는 그 괴식물을 숨어서 관찰하는 시선을 만들어낸다. 펜엑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부유한다’는 표현보다는 ‘자라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그들은 같은 뿌리에서 그저 무한정 멀리 뻗어나간다. 물론 <보이지 않는 물결>에 겉멋이 없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영화의 의미를 스스로 방기하는 쪽을 택한 것은 단점이다. 더불어 그건 제스처의 장난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는 단 한마디의 농담도 없는데 어딘가 장난기가 배어 있다. 배 안의 방 안에 갇혀 있는 노이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안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또는 자주 호텔방을 찾지 못한다. 상징이라고 보기에는 치기어린 놀이다. 때로는 설명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제스처만 보이는 방식도 마찬가지 감응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런 태도를 떨치고 나면 펜엑의 영화는 새로운 괴물이 될 것 같다. 그래서 펜엑의 다섯 번째 장편 <보이지 않는 물결>은 다른 영역의 이미지가 탄생할지도 모를 미완의 조짐이며, 매력적이다. 켄타우로스를 꿈꾸는 자가 만든 미완의 괴식물성 이미지, 그게 이 영화에 거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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