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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해, 말을 하란 말야!
2001-08-29

김지운 칼럼

작업을 하다보면 신인연기자들도 만나고 후배연기자들도 만나게 된다. 아직 연기력이 본격적으로 검증된 것이 아니니까 우선 그 연기자의 이미지를 보고 느낌을 본다. 이미지와 느낌이 좋으면, 거의 확정하는 편인데 모든 캐스팅 작업이 이대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이미지와 느낌이 다 맞는데 개런티가 맞지 않을 때도 있다.

“당신의 이미지와 느낌이 이 배역에 맞는 것 같으니 같이 작업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캐스팅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다. “당신의 이미지와 느낌이 이 배역에 맞는 것 같은데 개런티가 안 맞는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떻게 안 될까요?” 하거나 “그렇게 개런티가 중요합니까? 그렇다면 이번 한번만 봐주실래요?”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냥 쿨하게 연기자를 만난 뒤 집에 들어가 무릎꿇고 기도나 드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행히 이미지와 느낌, 게다가 개런티까지 맞아서 축복받은 기분으로 첫 리딩을 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대사를 읽으면서 갑자기 연기를 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첫 리딩 때 열연까지 하는 연기자들도 보았다. 연기는 대사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사의 동기를 연기하는 것이다. 리딩 때나 현장에서나 나는 신인연기자들이나 후배연기자들한테 줄곧 다그치는 말이 있다. 말을 해! 말을 하란 말야! 왜 말을 안 하지? 리딩 때 낭패스러울 경우는 이렇게 알지도 못하는 감정을 미리 잡는 감정파와 그냥 책을 읽는 낭독파가 있다. 둘다 말을 안 하긴 마찬가지다. 저런 대사를 관객이 듣는다는 생각을 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발음이나 음색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것들은 연기자들에게 부차적인지도 모른다. 우선 말은 전적으로 말같이 들려야 하는 것이다. 말을 하려면, 귀를 열어야 한다.

남의 말을 들어야 자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연기란 게 들은 만큼 주면 되는데 남의 말을 듣지 않고 혼자서 하려니까 잔뜩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는 것이다. 연기의 70%는 리액션이란 말이 있는 것도 잘 듣고 대답하라는 중요한 숨은 뜻이 있는 것이다. 대사가 말 같아지면 연기는 그때부터 시작된다고 봐도 된다. 이런 것은 비단 연기자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직 대통령들이 텔레비전에 나와 대국민을 상대로 말씀이라고 하는 걸 보면 밥먹고 있다가도 당장 텔레비전 속으로 뛰어들어가 대통령의 멱살을 부여잡고 “제발 말을 해! 말을 하란 말야!”라고 다그치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왜 말을 안 할까? 외국의 경우, ‘부적절한’ 예를 드는 것 같지만 빌 클린턴이 텔레비전에 나와 스피치할 때 그냥 편하게, 쿨하게 말하는 모습을 본다. 그런데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들의 말하는 모습을 기억해보면 한결같이 잔뜩 불필요한 힘과 권위만 들어 있어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할 말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항상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본인은…” 하는데 말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하나도 친애하지 않는다. 국민의 말을 안 들어서일까 독재자들의 말은 하나같이 무겁고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웠다. 바라건대 다음 대통령은 말을 편하게 하는 사람이 뽑혔으면 좋겠다. 말을 말처럼 안 하고 허영심이나 권력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과 있으면 기분을 잡친다. 나 또한 말투가 워낙 느리고 느끼해서 혹시 상대가 내 말투와 어감을 듣고 권위적으로 생각할까봐 말에 힘 안 주고 가볍고 빠르게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누군가에게 어울리지 않게 왜 그렇게 촐싹거리냐는 핀잔을 받기도 한다. 사실 이게 말인데…. 김지운/ 영화감독·<조용한 가족><반칙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