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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여자의 성장드라마 <허브>
정재혁 2007-01-10

대사발로 울리는 영화의 한계, 아무런 향도 나지 않는다

동화 속 세계는 장애의 현실과 마주할 수 있을까. <신부수업>을 연출했던 허인무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허브>는 동화 속 세계에 사는 20살 여자의 성장드라마다. 정신지체 3급 판정을 받은 상은(강혜정)은 정신연령이 7살에 머물러 있는 ‘지각생’. 그녀는 <미녀와 야수> <백설공주> 등 동화 속 주인공들과 대화하고, 초등학생 친구들과 함께 생일파티를 열며, 7살 꼬마에게 사랑에 대한 조언을 구한다. 이렇게 구축된 세계는 매우 견고해서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거리의 신호를 지키고, 누군가에게 ‘바보’라는 말을 들으면 엄마 현숙(배종옥)이 시킨 대로 상대방의 팔을 꽉 깨물어 방어한다. 동화 속 성문처럼 굳게 닫힌 세계. 그 틈을 비집고 사랑과 이별이 들어오면서 ‘지각생’이 성장하기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 상은은 한번의 만남과 두번의 이별을 경험한다. 경찰 종범(정경호)과의 사랑이 첫 번째 만남과 이별이며, 엄마의 죽음이 두 번째 이별이다. 그리고 이는 모두 상은의 홀로서기를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사랑이 시작되면 아픔이 있게 마련이고, 만남 뒤에는 항상 헤어짐이 찾아온다는 진리가 상은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허인무 감독은 상은과 종범, 상은과 현숙의 이야기를 엮어내면서 감정의 동요가 큰 지점들을 잘 잡아낸다. 순수해서 좋다며 쫓아다녔던 종범은 상은이가 정신지체라는 사실을 안 뒤, “잠깐만요”라는 말을 남긴 채 돌아오지 않고, 자전거 연습을 하던 상은은 “몇번이고 넘어져도 좋지만 반드시 일어나라”는 엄마의 충고를 되새긴다.

하지만 이러한 장면들은 다소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다. 감정의 맥락은 이해가 되지만, 그 흐름이 부드럽지 못하다. 눈물을 의도한 설정들이 충돌적으로 튀어나온다는 느낌도 배제할 수 없다. 전작 <신부수업>에서도 허인무 감독은 서품식 앞에서 주저하는 신학생의 감정을 잘 포착했다. 하지만 이를 영화 전체적으로 끌고 가는 데에는 실패했다. <허브>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특정 장면과 대사는 눈물샘을 자극할 만큼 슬프고 감동적이다. 씩씩하고 밝게 살아가는 상은의 캐릭터도 신선하고 반갑다. 하지만 문제는 그 감정과 캐릭터, 장면들이 한편의 영화 속에 유기적으로 녹아들지 못한다는 점이다. 영화(혹은 상은)의 결정에 동의하고, 상은의 앞날을 응원할 순 있지만 이입엔 실패하게 되는 셈이다. 눈물과 눈물 사이, 대사와 대사 사이의 여백을 좀더 고민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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